로마서 강해 제1장--"믿음에서 믿음으로"
제1장
“믿음에서 믿음으로”
산상설교의 “눈은 몸의 등불이니 눈이 밝으면 온 몸이 밝을 것”이라는 말씀을 이해했을 때의 기억이 납니다. 예수님께서 그 말씀을 하신 의도와 그 의미가 무엇인지, 왜 그 자리에서 그 말씀을 하셨는지 알 수 없어 약 1년 동안 고민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후 성경을 전공하면서 이 말씀이 어떻게 해석되었는지를 살펴보았지만, 그 말씀의 정확한 의미와 문맥을 명확히 설명한 글을 찾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그 후 성경 전체를 거의 다 공부하고 나서야 저는 그 말씀의 의미와 문맥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고, 그 짧은 말씀 속에 구원뿐만 아니라 인간사에 대한 진리가 담겨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이런 의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왜 예수님은 진리를 이렇게 이해하기 어렵게 가르치셨을까? 산상설교에는 중학생 정도라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표현 속에 구원의 핵심적인 가르침이 담겨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가르침의 깊은 의미를 하나씩 깨닫게 될 때, 두 가지 생각이 듭니다. 하나는 '역시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구나' 하는 깨달음이고, 다른 하나는 '정말 중요한 진리는 이렇게 감추어 두시는구나' 하는 생각입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는 천국의 비밀을 이렇게 감추어 두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1:25-26).
로마서 1장 17절에 나오는 “믿음에서 믿음으로”라는 말씀도 그런 표현 중 하나입니다. 1장 17절은 16절과 함께 로마서의 서문이라고 보는 데 이견이 없습니다. 서문은 그 책의 길라잡이 역할을 합니다. 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예고해 주며, 내용이 어렵거나 복잡하거나 너무 많아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에 독자가 올바른 방향으로 이해하고 있는지를 판단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서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책의 내용을 엉뚱하게 해석할 위험이 있습니다. 따라서 서문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마치 집을 지을 때 모퉁이 돌을 올바르게 놓는 것과 같습니다.
로마서의 서문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주는 표현이 바로 “믿음에서 믿음으로”입니다. 따라서 이 말을 이해하는 것이 로마서의 서문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한 열쇠입니다. 이 말씀을 정확히 이해해야 로마서의 서문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고, 그 서문이 제시하는 길라잡이를 통해 로마서 전체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 말씀이니 이해하기 어렵게 표현된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듯이, 진리에 귀 기울이고 순종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결국 온전히 이해하게 되어, 로마서가 가르치는 구원의 진리를 깊이 깨닫게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13:12).
먼저, 로마서 1장 16절과 17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사도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그 이유가 복음이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왜 복음이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일까요? 사도 바울은 복음 속에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 있어서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게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성경 원어에는 “믿음에서 믿음으로”라는 표현만 있을 뿐, 한글 성경처럼 “~에 이르게 한다”는 표현은 없습니다. 정말 좋은 의역입니다. “믿음에서 믿음으로”가 내포하고 있는 믿음의 출발과 성장의 목표의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번역은 출발점에서 시작한 믿음이 목표하는 믿음으로 성장하게 하시는 복음에 드러난 하나님의 능력을 정확히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구원에 드러난 하나님의 능력을 한마디로 표현하고 있는 “믿음에서 믿음으로”라는 말을 이해하는 것이 1장 16-17절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말을 이해하는 것이 곧 복음을 통해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이해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믿음에서”와 “믿음으로” 각각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기 전에는 이 말이 왜 하나님의 능력을 표현한 것인지를 온전히 이해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에서 믿음으로”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입니다. 이제 “믿음에서”와 “믿음으로”의 의미를 차례대로 살펴보겠습니다.
“믿음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은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차별 없이 열려 있지만, 오직 믿는 사람에게만 역사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아무리 크고 구원의 능력이 아무리 확실하더라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역사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그 사람에게 역사하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입니다. 복음을 들어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은 그 사람에게 유익이 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4장 2절에는 이에 대한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모세의 인도 아래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조상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주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으로 인해 약속한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엎드러졌습니다. 이 기록은 현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은 우리에게 주는 경고입니다. 즉, 복음을 듣고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모세 시대의 이스라엘 민족과 같은 결말을 맞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인 복음이 그 사람에게 유익이 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믿음이 필수적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근원은 무엇일까요? 믿음을 생기게 하는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로마서 10장 17절,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는 말씀이 이를 잘 설명해 줍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말씀’은 바로 복음입니다. 복음은 사람의 믿음이 시작되게 하므로, 믿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위한 능력이 됩니다. 그렇다면, 복음이 어떻게 믿음이 시작되게 하는 것일까요?
복음과 믿음의 시작
제 아버지의 예를 들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큰 형님이 목사인데, 형님을 해외로 파송한 교회가 부모님께서 사시던 도시에 있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어떻게 애비가 되어서 모른 척할 수 있냐?"며 그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셨습니다. 하지만 교회에 다니시면서도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른 후, 아버지께서 팔순 기념으로 캘리포니아에 사시는 큰 누나 댁에 어머니와 함께 방문하셨습니다. 저는 그때 성경을 전공하기 시작한 지 4년째였습니다.
누나 댁에서 아버지를 만난 다음 날 새벽, 인기척에 잠이 깼습니다. 무슨 소리인가 하고 거실로 나갔는데, 이미 희뿌옇게 밝아진 거실 밖 패티오 의자에 아버지께서 덩그러니 앉아 계셨습니다. 저는 테이블 맞은편에 앉았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일어났냐?”고만 하시고, 어색한 침묵이 흘렀습니다. 그 순간, 4년 만에 다시 만난 아버지에 대해 너무 애틋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제가 점점 더 세상적인 삶과 멀어져 가고 있음을 알았기에, 부모님이 한국으로 돌아가시면 언제 다시 뵐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파왔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건강하셨지만, 이미 팔순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버지께 제 솔직한 심정을 말씀드렸습니다.
“아버지, 이번에 돌아가시면 언제 다시 뵐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제 공부도 끝나려면 아직 멀었고요….”
숨을 약간 몰아 쉬시며 아버지가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말씀을 들으니, 가슴 한켠이 아파 왔습니다. 그 아픈 마음을 이기려는 듯 저는 말했습니다. “아버지,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는 방법이 있어요.”
그동안 한 곳만 멍하니 바라보며 무심히 말씀하시던 아버지가 몸을 제 쪽으로 돌리시며,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으셨습니다. “그래? 그게 뭔데?”
저는 확신 있게 말씀드렸습니다. “우리 모두 다 천국에 가는 거예요. 우리 모두 천국에 가면 다시 만날 수 있어요. 모두 다 만날 수 있어요!”
아버지는 놀라서 눈을 크게 뜨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목소리가 약간 흥분되어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천국에 가냐?”
“지금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예수님을 잘 믿으시면 돼요.”
제 대답을 기다리셨다는 듯 아버지가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그럼 그래야지. 암만 그래야지. … 오늘부터 예수님 잘 믿고 살으마.”
그날, 가족들이 모두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시고 한 시간가량 떨어진 해변으로 갔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아버지와 어머니께 세례를 베풀어 드렸습니다. 그 이틀간의 짧은 만남이 아버지와의 마지막이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가신 부모님께서는 열심히 교회에 나가셨다고 합니다. 교회까지는 차로 20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지만, 차가 없으셨던 부모님께서는 농업용 사륜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셨습니다. 어머니께서 편히 앉으실 수 있도록 아버지께서 직접 뒷자리에 의자를 달아 두 분이 함께 타고 다니셨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한 번 결심하시면 끝까지 실천하시는 분이셨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예배를 거르시는 일이 없었습니다. 비 오는 날이면 두 분이서 우의를 입고 교회에 가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륜 오토바이가 빗길에 미끄러지는 사고가 나면서 어머니께서는 뇌경색을 앓게 되셨고, 지금도 약을 드시고 계십니다.
아버지는 다행히 큰 부상 없이 무사하셨지만, 안타깝게도 2년 후 경운기를 몰고 가시다가 트럭에 받히는 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께서 나중에 말씀해 주셨는데, 아버지는 예수님을 받아들이신 이후 단 한 번도 기도를 거르신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돌아가시는 날 아침에도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하신 후 식사를 하시고 나가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잘 믿으면 그토록 보고 싶어 하셨던 자녀들과 손주들을 천국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복음을 듣고, 아버지께서는 그 믿음을 가슴에 품으셨던 것입니다.
제 아버지의 예에서와 같이 복음은 마음을 열고 듣는 사람에게 믿음이 생기게 합니다. “믿음에서 믿음으로” 중에 “믿음에서”가 이 믿음의 시작을 표현합니다. 이 믿음이 생기는 것은 복음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복음을 듣는 사람의 마음을 열어 믿음을 가지게 합니다. 내 아버지의 예를 생각해 보면, 자식들과 손주들을 다시 만날 수 있는 길이 있는데, 예수님을 잘 믿어 천국에 가는 것이 그 길이라는 복음을 듣고, 그 하나님의 의를 얻기 위해 믿음으로 반응하신 것입니다.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그 의를 받으시기 위해 그 전에 없던 믿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은 복음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기 위해 믿음을 갖게 되는데, 이 믿음이 생기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즉 복음으로 말미암는다는 말씀이 이를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의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하나님의 의가 무엇이길래 사람으로 하여금 믿음을 갖게 하는 걸까요? 하나님의 의란,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로 값없이 죄사함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3:22-26).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기에, 그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와 상관없이, 그리고 어떤 행동을 해야 할 필요도 없이, 죄사함, 곧 구속의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에는 두 가지 핵심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독생자를 대속물로 내어주셨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누구에게나 구원을 주신다는 점입니다. 로마서 3장 25절은 이 두 가지를 한 문장에 담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이 예수를 그의 피로 인하여 화목제물로 세우셨”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 화목제물이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전에 지은 모든 죄를 용서받을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 방법으로 독생자 예수를 모든 죄인의 죄값을 대신 치르는 화목제물로 내어주셨습니다. 화목제물이란 죄인의 죄값을 대신해 치르는 제물을 의미합니다. 모세의 율법에서는 소나 양을 화목제물로 바쳐 하나님의 죄사함을 받도록 했었습니다. 그러나 때가 찼을 때,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를 화목제물로 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이 화목제물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누구나 이전에 지은 모든 죄의 값을 치를 수 있게 정하셨습니다. 이로써 세상의 모든 죄인들이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잠재우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는 길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의 첫번째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의의 다른 하나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죄사함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길이 다름 아닌 바로 믿음으로라는 점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구속의 은혜를 받을 수 있게 하셨다는 점입니다. 믿음으로 라는 것은 누구나 차별 없이 예수님의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죄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전에 어떤 삶을 살았든, 얼마나 큰 죄인이든, 모세의 율법을 가진 유대인이든,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이든 아무것도 상관없이,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모두 동일하게 구원을 받을 수 있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의의 또 하나의 핵심입니다. 이것의 중요성을 설명하면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의의 이 측면을 “그리스도의 비밀”이라고 표현합니다 (에베소서 3:3-6). 예수 그리스도를 죄인들을 위한 화목제물로 내어주신 것이 하나님의 의의 가장 중요한 내용임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차별없이 구속의 은혜를 받을 수 있게 하신 것도 간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의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의와 믿음의 시작
복음을 듣는다는 것은 곧 이 어마어마한 하나님의 의를 듣는 것입니다. 이 의를 듣는 순간, 머리가 있고 마음이 열린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의를 받고 싶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에게는 자연스럽게 믿음이 생깁니다. 복음이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되는 이유는, 복음이 사람들이 간절히 받고 싶어 하는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 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토록 거부할 수 없을 만큼 좋은 것을 값없이, 오직 믿기만 하면 받을 수 있도록 정하셨습니다. 그렇기에 복음을 듣고 그 의를 받고자 하는 사람은 믿음으로 화답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다시 말해, 믿음이 없던 사람이 복음을 듣고, 그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놀라운 의를 받기 위해, 믿음을 갖게 되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의는 사람에게 믿음을 갖게 함으로써 구속 곧 죄사함을 얻게 합니다. 믿음으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그 하나님의 좋은 의를 나타낸 것이 바로 복음이기에, 복음을 두고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구원이기 떄문입니다.
믿음으로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인 사람이 곧 구원을 받은 사람입니다. 사람이 복음을 들었을 때, 그 복음을 받아들이는 믿음을 하나님께서는 의로 여기십니다. 다시 말해,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의롭다 여기신다는 뜻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는 것이 곧 죄사함이며, 구속입니다. 의롭다고 여긴다는 것은 죄가 없는 자로 대우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원어나 영어 표현(justification)에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한글로 직역하자면 "정당화해 주다"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한글 번역에서는 이미 널리 알려진 표현인 “의롭다 여기다”가 사용되고 있습니다(예: 로마서 3:24). 이 말은 죄가 없는 자로 여긴다는 뜻이며, 이는 곧 죄사함, 즉 구속의 결과입니다. 더 익숙한 표현으로 하자면 용서입니다. 로마서 3장 25절 후반부에 나오는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신다”는 말이 바로 이를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시고, 죄를 짓지 않은 사람과 같이 대우하신다는 것이 구원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인데, 그 삯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대신 갚아 주심으로써 더 이상 치러야 할 죄의 삯이 없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구원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하면, 복음을 통해 나타내신 하나님의 의를 받기 위해 믿음이 생기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에베소서 2:8). 그래서 복음을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라고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은 믿음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사람을 구속, 곧 죄사함을 받고 구원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것이 바로 그 첫 믿음입니다. 이는 구원으로 나아가는 출발점에 존재하는 믿음으로, 이를 표현한 것이 바로 “믿음에서”라는 표현입니다.
의롭다 여긴다는 그리스어 원어를 영어로 번역한 것이 justification이라고 앞서 언급했습니다. 로마서 3-4장을 다룰 때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간단히 언급하자면, 이 말은 ‘의롭지 않던 상태에서 의로운 상태로 변화시키다’는 의미이며, 이 변화에는 출발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를 시각적으로 표현하자면, 경계선을 사이에 두고 경계선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겨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죄와 사망의 어둠 속에 있던 사람이 광명한 의와 생명의 세계로, 사단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세계로 들어온 것입니다(사도행전 26:18). 이제 갓 들어섰으니, 경계선 바로 안쪽에 서 있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구원의 중심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구원에 있어 멈추는 것은 곧 퇴보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첫 믿음으로 죄사함, 곧 구속의 은혜를 입고 의롭다 여김을 받아 구원의 길에 들어선 사람은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야 합니다 (요한일서 2:6). 첫 믿음이 구원의 길에 들어서게 했지만,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멀고도 험한 구원의 길을 걸을 수 있게 하는 것도 역시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구원의 길은 결코 장밋빛 꽃길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시밭길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에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은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고 하신 말씀(마태복음 7:14)이 이를 증거합니다. 믿음 없이는 이 험난한 길을 끝까지 걸어 구원의 종착점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복음을 듣고 시작된 믿음은 인생의 모든 여정을 지나, 영원한 안식처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인도해 주는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믿음으로”
복음이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인 이유는 그 안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사람에게 믿음을 갖게 하기 때문임을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이 하나님의 의는 단지 첫 믿음을 가지게 할 뿐 아니라, 믿음으로 더욱 나아가게 합니다. 이는 “믿음에서 믿음으로”라는 표현 중 “믿음으로”가 보여 주는 의미입니다. 이제 이 하나님의 의가 어떻게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하는지, 그리고 그 뜻이 무엇인지를 살펴볼 차례입니다.
구원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사람으로 하여금 첫 믿음을 갖게 한다는 것은 비교적 이해하기 쉽습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서 말하는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는 구절이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처음 가지게 된 믿음이 어떻게 지속되며 더욱 성숙해지는지에 대해서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다행히 로마서 1장 17절에서 바울이 인용한 하박국 선지자의 글이 이에 대한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이 구절이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였음은 “~라고 함과 같으니라”라는 연결 표현을 통해 분명합니다. 따라서, 하박국 선지자의 인용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면 “믿음에서 믿음으로”의 뜻도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의 이해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두 번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여기 주어인 ‘의인’ 대신에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의인을 의미하는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의롭다 여김을 받은 사람’을 적용해 문장을 다시 쓰면,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여 의롭다 여김을 받은 사람은 믿음으로 살리라”가 되기 때문입니다. 전자의 믿음은 복음을 처음 받아들일 때의 믿음을 가리키며 그 믿음으로 사람이 의롭다 여김을 받은 믿음입니다. “믿음에서 믿음으로” 중 “믿음에서”의 믿음에 해당합니다. 그 처음 가진 믿음을 갖게 된 사람은 믿음으로 사는데, 지금 이 후자의 믿음이 어떤 믿음인지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 후자의 믿음이 어떤 믿음인지를 파악하기 위해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라는 말씀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그 말 자체가 의미하는 것은 말 그대로,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은 사람은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즉, 당연하다는 말이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기신 사람은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이고, 그 사람은 반드시 그 믿음에 합당하게 산다는 말입니다. 반대의 경우를 보자면, 입술로만 고백하는 믿음이지, 참된 믿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은 결코 믿음으로 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판단하시는 의로움은 결코 틀림이 없기에, 진정한 믿음이 없는 사람이 의롭다 여김을 받는 경우는 있을 수 없습니다.
이를 이해하자면 사람의 판단과 하나님의 판단의 차이를 알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믿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였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진정한 것으로 믿어 줍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타인의 속마음이나 정신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직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만을 의롭다고 여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의 믿음이 진짜인지 아니면 가짜인지 훤히 아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믿음의 진정성을 온전히 판단하시는 하나님께서, 거짓 믿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이는 척하는 사람을 의롭다고 여기시는 실수를 하시지 않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7절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신다,” 즉 ‘아무도 하나님을 속일 수 없다’는 말씀이 이를 말해 줍니다.
따라서 거짓된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하박국 선지자의 말씀,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결코 적용되지 않습니다. 결국 그들의 삶이 그들의 믿는다는 말이 거짓임을 증거합니다. 말로는 복음을 받아들였다고 하면서도 세상의 풍조와 세상적 욕망을 따라 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구원에 있어서 사람의 판단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하신 사람만이 진정으로 의로운 사람이며, 그 의은은 어떤 일이 있어도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하박국의 인용문이 뜻하는 바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주제가 구원의 확신에 관한 논쟁입니다. 어떤 교파에서는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확신만 있으면 구원받은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의 문제점은 그들이 말하는 구원의 확신이 사람의 확신에 불과하다는 점입니다.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확신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구원에 대해 진정으로 확신하고 계신지는 심판대 앞에 서기 전에는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구원 받았는가 아닌가에 대한 판단은 인간이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구원받았다는 자신의 확신만 있으면 구원받았다고 믿는 것은 구원받고자 하는 자신의 바램을 구원이라고 착각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만일 진정으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싶다면 오직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의은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의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는 하나님의 선포입니다. 이 선포는 하나님의 의인에 대한 신뢰의 선언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의인은 반드시 믿음으로 산다’는 확신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내 의인에 대한 나의 판단은 결코 틀리지 않는다’라는 신뢰와 확신을 표현하시는 말씀입니다. 욥에 대한 하나님의 확신이 그 예입니다. 사탄의 참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욥을 신뢰했습니다 (욥기 1:2, 2:3). 두 번의 극심한 환란에도 불구하고 욥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으로부터 옳다함을 인정받았습니다 (욥기 42:7-8). 하나님의 이 확신은 욥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욥과 같이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 여긴 의인들 모두에 해당합니다. 하박국 선지자를 통해 하신 이 말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동서고금을 통해 변함없는 하나님의 그의 의인들에 대한 신뢰의 선포입니다.
참고로, 이 선포의 의미를 담고 있는 표현이 바로 “살리라”입니다. 영어 번역은 “shall live”로 하는 경우도 있는데 “will live”가 맞습니다. Will이 진리를 선포하는 의미를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shall은 말하는 이 즉 하나님의 의지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야 하리라,” “의인은 내가 살게 해 주겠다,” “의인은 내가 생명을 주겠다”는 의미로 풀이되게 됩니다. Shall이 가진 말하는 이의 의지를 가장 잘 나타낸 것이 십계명에 쓰인 경우입니다. “You shall not murder”(살인하지 말라)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하박국의 인용문은 하나님의 의지가 아니라 주어가 스스로 결단하고 행동할 것을 선언하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의인은 반드시 당연히 믿음으로 살 것이다”라고 주어에 대한 하나님의 확신을 표현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will live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이 선언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선언입니다. 하나님의 이 선언은 사람이 하는 장담과는 전혀 다릅니다. 사람의 장담은 근거가 있든 없든 틀릴 수 있지만, 하나님의 선언은 결코 틀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선언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은 의인이 믿음으로 사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보시고 확인하심으로써 확실히 아신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은 그 의인이 처음 믿음을 가질 때, 그 믿음으로 살아갈 그의 인생 전체를 이미 직접 보시고 확인하시고 아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사람의 믿음을 의로 여기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의로 여긴 사람은 하나님이 이미 보신 믿음으로 사는 삶을 삽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바로 하나님이 보신 것을 그대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런 능력을 “미리아심 foreknowledge”이라고 합니다. 로마서 8장 29절, 베드로전서 1장 2절 등이 하나님의 미리 아심을 언급합니다. 하나님의 미리 아심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신 능력의 일부인데, 미래를 미래 아시는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는 시간도 제약이 되지 않습니다. 미래도 현재나 과거와 다를 바 없이 하나님의 눈 앞에 그대로 다 펼쳐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 미리 아시는 능력으로 그 의인의 죽기까지의 삶을 보시고, 그 사람이 죽기까지 믿음을 변치 않고 오히려 강하여져서 살아가는 것을 확인하시고, 그에 기초해서, 그 사람의 처음 믿은 믿음을 의로 여기시고, 나아가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The righteous will live by faith”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미리 아심에 기초한 이 선언은 결코 틀릴 수 없는 진리인 것입니다.
“하나님의가 나타나서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가 “믿음에서 믿음으로”의 의미를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처음 믿는 믿음에서 믿음으로 사는 믿음으로의 계속, 성장, 발전을 의미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를 풀어쓰면,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은 사람은 믿음으로 살리라’임을 이미 보았는데, 여기서 전자의 믿음이 “믿음에서”의 믿음이고, 후자의 믿음이 “믿음으로”의 믿음입니다. 따라서 “믿음에서 믿음으로”는 처음 복음을 받아들일 때의 믿음이 죽기까지 믿음으로 살아가도록 힘을 주는 믿음으로 계속되고 성장하고 성숙해져야 하는 것을 표현합니다. 결국, “믿음에서”의 믿음은 복음을 처음 받아들이는 믿음이고, “믿음으로”의 믿음은 믿음으로 사는 의인의 믿음입니다.
“믿음으로”의 믿음은 처음 복음을 받아들일 때 생긴 믿음이 사라지거나 퇴색되지 않고 오히려 더 강해져, 세상을 이기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 수 있도록 영적인 힘을 줄 수 있는 성숙한 믿음을 말합니다. 이 믿음은 처음 복음을 받아들일 때 가졌던 믿음과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지만, 삶의 소용돌이 속에서 단련되어 정금처럼 순수해진 믿음입니다 (베드로전서 1:7). 세상의 유혹을 이기게 하고, 삶을 뒤엎을 것처럼 덮쳐오는 고난을 뚫고 천국을 향해 계속 나아가게 하는 믿음입니다. 또한, 핍박을 이기며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섬기게 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지 않게 만들어 주는 믿음입니다. 한마디로, 이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죄와의 싸움을 멈추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싸움을 이기게 하고, 죽기까지 복음의 증인으로 살게 해 주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선조들이 본을 보인 믿음입니다. 그 모든 선조들은 믿음으로 살았으며, 그 믿음이 그들에게 삶을 살아갈 힘과 용기와 지혜를 주었습니다. 예를 들어, 의로운 제사를 드린 아벨,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에녹, 구원의 방주를 만든 노아, 100세에 얻은 독자를 하나님께 번제로 바친 아브라함,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바로로부터 구출한 모세 등, 이 모든 믿음의 선조들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이끈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바로 “믿음으로”의 믿음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기도 했습니다 (히브리서 11:33-37). 이 모든 위대한 승리들은 모두 살아 역사하는 믿음으로 이룬 것들입니다. 이 믿음이 “믿음으로 살리라”고 말씀하셨을 때의 믿음이고, “믿음에서 믿음으로” 중 후자의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로마서 서론과 결론에 언급되어 있는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1장 5절과 16장 26절에는 공통적으로 “순종하는 믿음”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먼저, 1장 5-6절에서는 바울의 사도로서의 직분이 “순종하는 믿음”을 갖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6장 26절에서는 복음을 나타내신 하나님의 목적이 모든 민족으로 “순종하는 믿음”에 이르게 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때의 “순종하는 믿음”은 단순히 이론적인 믿음이 아니라, 실제로 순종하는 삶을 사는 사람의 살아 움직이는 믿음입니다. 이 “순종하는 믿음”이 바로 믿음으로 사는 의인이 가진 믿음, “믿음에서 믿음으로” 중 후자의 믿음입니다.
“믿음에서 믿음으로”는 복음을 처음 받아들일 때의 믿음에서 출발해, 변치 않고 하나님의 의에 합당한 삶을 살게 해 주는 믿음으로 성장하고 지속되는 과정을 표현한 말입니다. 이렇게 믿음이 단순히 복음을 받아들이는 데서 멈추지 않고 살아 움직이는 믿음으로 성장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와 믿음으로 사는 삶
그렇다면 하나님의 의가 어떻게 처음 믿은 믿음에서 믿음으로 사는 믿음에 이르게 하는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참된 믿음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그 어마어마하게 좋은 하나님의 의를 잃지 않기 위해, 그 믿음을 결코 저버리지 않고 끝까지 믿음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을 잃고, 믿음으로 살기를 포기하면, 그것이 곧 의의 죽음이자 구속의 은혜가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일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제 삶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믿기 전, 많은 죄를 지으며 살았습니다. 사업을 시작하면서 어떻게든 성공시키겠다는 마음으로 고객들을 접대하며 수많은 부끄러운 일을 저질렀습니다. 접대 과정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친구들과 어울리며 또 다른 죄를 쌓았습니다. 사업이 안정 궤도에 들어서고, 이전에 상상도 못했던 돈을 벌게 되었을 때, 저는 영혼마저 병들기 시작했습니다. 오만과 교만이 저를 휘감았고, 돈의 힘에 의지하며 세상적인 욕망에 빠졌습니다. 그때 저질렀던 죄들은 물론,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모르고 육신의 정욕을 억제하지 못했던 수많은 죄들이 저를 얽매고 있었습니다.
결국 방탕한 생활과 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풍을 맞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하나님을 믿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을 공부하며 하나님의 은혜로 죄사함을 받을 수 있음을 알았을 때, 저는 너무나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특히 세례를 받기 전날 밤은 잊을 수 없습니다. 죄사함을 받기 위한 그 순간이 너무나 기다려져서 거의 뜬눈으로 밤을 보냈습니다. 새벽까지 깨어 기도하며 다시는 의도적으로 죄를 짓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날 이후, 내년 7월 26일이면 제가 믿음의 길을 걸어온 지 만 20년이 됩니다. 물론, 죄 없이 살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죄로 돌아가지 않으려는 노력을 계속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죄로 돌아가는 것은 곧 은혜로 값없이 얻은 죄사함, 즉 구속의 은혜를 잃어버리는 일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처음 복음을 받아들일 때 가졌던 그 믿음은 지금도 제 삶 속에서 살아 역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믿음이 제 안에서 힘 있게 작용하여, 제가 하나님의 의를 잃지 않도록 믿음으로 살게 해주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의가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를 참되게 경험한 사람은 그 은혜를 잃지 않기 위해 끝까지 믿음으로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왜 하나님의 의가 믿음으로 사는 사람의 믿음에 이르게 하는지를 복음과 관련하여 좀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한마디로 죄와 죽기까지 싸우는 것입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모든 죄인들이 죄사함을 받을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내어주신 사건을 말합니다. 이 복음을 믿는 자는 헬라인이든 유대인이든 상관없이 누구든 죄사함 곧 구속을 얻을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과거 행실과 상관없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속을 받을 수 있게 하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를 받기 위해 믿음이 시작되며, 그 의를 잃지 않기 위해 믿음으로 사는 삶이 계속됩니다. 그런데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의 핵심은 죄와의 싸움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세우시기까지 하신 이유는 오직 죄를 없이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3장 5절이 이를 분명히 말합니다: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죄를 없이하기 위해 독생자를 내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고 기꺼이 화목제물이 되셔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죄사함을 받았다고 믿는 사람이, 어떻게 계속하여 죄 가운데 살 수 있을까요? 바울은 로마서 6장 1-2절에서 이를 강력히 부인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결론적으로,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죄와 싸우며, 죄를 없이하기 위해 치러진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을 보여줍니다. 이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진정한 믿음을 통해 받아들인 사람은, 죄와 싸우는 삶을 삽니다. 그리고 이 죄와 싸우는 삶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가능하기에, 이 사람은 믿음으로 삽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죄성을 가진 육신을 입고 죄악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데, 이런 상황에서 죄와의 싸움을 이기는 길은, 오직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를 바라보는 것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2:2). 자신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 위에서 피 흘리시기까지 죄와 싸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분의 정신을 본받 것만이 죄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히브리서 12:4).
제 삶도 부족하나마 이러한 진리를 증거합니다. 저는 복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주신 이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셔야만 했던 이유가 바로 죄를 없애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믿음으로 죄사함 곧 구속을 받은 후에도, 그 믿음을 버리지 않고 오히려 더 굳건히 다져왔습니다. 지금까지 죄와 싸우는 삶, 죄 없이 살기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살아오고 있습니다.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저로 하여금 처음 믿음을 갖게 했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믿음으로 살도록 붙들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삶과 “믿음으로”
결론적으로, 로마서 서문인 1장 16절과 17절을 요약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인데, 그 이유는 복음에 있는 하나님의 의가 복음을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믿음을 가지게 하고, 그 믿음이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의에 합당한 삶을 살게 하는 믿음으로 성장하게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처음 믿음을 갖게 할 뿐만 아니라, 그 믿음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의에 합당한 삶을 살게 하는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점입니다. “믿음에서 믿음으로”는 이를 축약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로마서 서문에서 강조하는 것은 복음을 받아들일 때의 믿음만으로는 결코 구원에 충분하지 않으며, 반드시 살아가는 동안 죽기까지 하나님의 의에 합당하게 살 수 있도록 해 주는 믿음으로 성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로마서가 중점적으로 가르치는 것은 이 믿음입니다. 즉, “믿음에서 믿음으로” 중 후자의 믿음입니다. 이로써, 믿음으로 사는 것에 대한 가르침이 로마서의 핵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서문이 강조하는 내용은 그 책의 핵심적인 가르침을 이루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즉, 로마서의 가르침의 핵심은 믿음으로 사는 삶입니다.
로마서의 서문에 해당하는 1장 16-17절에서 열쇠의 역할을 하는 표현은 바로 "믿음에서 믿음으로"입니다. 이 표현을 통해 우리는 이 서문의 핵심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그 핵심은 바로 ‘왜 복음이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인가’입니다. 그리고 그 능력은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의를 통한 구원의 능력입니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처음 믿음에서 멈추지 말고 의인의 삶을 살게 하는 믿음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