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호 --우연, 필연의 한 조각

by 장민구 posted Jan 01,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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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나라에 우연은 없다. 사람의 눈에는 우연처럼 보이는 일들이 많지만 먼 훗날 뒤를 돌아보면 그 우연처럼 보이던 일들이 현재의 나를 만들어 냈음을 보게 된다. 화들짝 놀란다. 그 중 단 한 가지도 우연이 아니었음이 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지금의 우리를 빚어 내시기 위해 그 많은 일들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신 하나님의 세심한 인도가 비로소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람의 삶에서 우연은 하나님의 필연의 다른 얼굴이다. 빨리 일할 수 있는 비자를 받아 정식으로 일을 시작하고 싶어하는 내 마음과 달리 1년 간의 OPT기간에 인턴쉽을 한 것도 그 중에 하나다. [OPT란 Optional Practical Training의 약어로 4년제 대학을 마친 외국인 학생에게 일자리를 구할 수 있는 시간으로 1년을 허락해 주는 제도다. 과학, 기술, 공학 및 수학 전공(STEM) 외국 학생들은 2년 더 연장할 수 있다]

 

인턴쉽은 미시시피의 시골 마을에 있는 작은 교회에서 주일 오전에 성경공부와 설교를 그리고 저녁에 설교를 하는 것이었다. 15명 정도의 노인들이 출석하는 교회였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결코 작은 교회가 아니었다. 성숙한 분들이 아니었다면 아마 외국인인 나를 비록 1년이기는 했지만 사역자로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평생 시골에서 사신 그 노인분들이 알아들을 만큼 내 영어가 좋지는 않았다. 그래서 주일 아침에 교회에 갈 때마다 아이들에게 그날 설교할 것을 영어로 대략 설명하면서 발음을 교정하고 표현을 다듬었다. 지금도 고마운 것은, 50분 걸리는 그곳에 가기 위해 8시50분에 집에서 출발하니 항상 졸렸을 텐데도 한 번도 짜증내지 않고 한웅이와 한빛이가 나를 도와 주었던 것이다. 거기다가, 당시에 고1이던 한웅이는 의젖하게 찬송 인도까지 했었다. 

 

다른 어떤 것 보다 더 잊을 수 없는 것은 미스 조앤이다. 그분은 두분의 장로님 중 한분의 부인이었다. 키가 크고 이목구비가 큼직큼직하여 눈에 확 띄는 외모를 가진 분이었다. 언행에 어디 하나 악이 없었고, 항상 힘이 되는 말씀을 해 주시는 그런 분이었다. 정말 거룩한 분이었다. 

 

그분에 관한 몇 가지 잊지 못할 기억이 있다. 하나는 어느 주일 오전 예배를 마치고 사택에서 쉬고 있을 때 일어났다. 전화로 잠시 들려도 되냐고 연락이 왔고 우리는 반갑게 조앤을 맞았다. 어떤 처음 보는 악기를 가져 오셔서 한참을 우리에게 연주를 들려주시고 어떻게 연주하는지 설명해 주신 후에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셨다. 거의 80이 될 때까지 양심을 아프게 하던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한가지 일을 털어 놓았다. 

 

고등학교 때 외국에서 이민와서 영어를 잘 못해 다른 학생들 속에 섞이지 못하던 학생이 있었단다. 어느 날 밤,  ‘내일 부터는 용기를 내어 그 아이의 친구가 되어 주겠다’고 결심을 했단다. 그런데 그 다음날 학교에는 그 친구의 모습이 보이지 않더란다. 알고 보니 전날 밤 그 친구의 집에 불이 나서 가족 모두가 죽은 불상사가 있었더란다. 미스 조앤은 그 일이 평생 가슴에 얹혀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랬던지 외국인인 우리를 극진히 사랑해 주셨다. 특히 집사람에게 더 그랬다. 이니드(Enid) 미시시피는 전통적으로 부녀들이 가정에서 퀼트를 만드는데 조앤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것도 그분의 작품은 단연 빼어났다. 가난한 가정에서 자라 예술교육을 받지는 못했으나 타고난 재능이 있는 분이었다. 퀼트는 물론 음악에도 재능이 있어서 자녀들이 사준 우리에게 보여준 그 악기로 자유자재로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 냈다. 조앤이 가장 아끼는 퀼트 작품이 있다. 우리가 그 집을 방문했을 때 보여준 것이었다. 가로 세로 1.5미터쯤 되는 큰 작품이다. 분홍색을 기본으로 해서 만든 그 작품은 주변의 분위기를 밝게 해 주었다. 그렇게 아름답고 정성이 담긴 작품을 아들 딸들이 욕심을 내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앤은 그 작품을 아무에게도 주지 않고 자신의 집에 소장하고 있었다. 그런 작품을 내 아내에게 주었다. 내 아내를 친딸같이 사랑한다고 하셨는데, 친딸들이 달래도 주지 않던 그 작품을 아내에게 선물로 주었다. 그 작품은 지금 우리 집 식탁 옆 벽에 장식되어 보는 이들의 찬탄을 자아내고 있다. 

 

다른 한 가지 잊지 못할 일은 조앤이 천국으로 가신 그 일이다. 그곳에서 인턴쉽을 마친 후 1년 반 정도 지난 2016년 2월에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왔다. 그분이 돌아가신 것을 남편인 버디 장로로 부터 듣는데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평안한 마지막이었다. 어느 날 남편과 함께 장을 보기 위해 30분 정도 떨어진 베이츠빌로 나가는 길이었단다. 여느 노인들이 그렇듯이 차를 타니 졸렸던지 조금 얘기를 하다가 이내 잠이들었다고 한다. 베이츠빌 크로거 주차장에 도착해서 버디 장로가 조앤을 깨웠는데, 이미 돌아가신 상태였단다. 말그대로 주무시다가 돌아가신 것이다. 신장에 이상이 있어서 1년에 한 번 정도 정기 검진을 받는 것 외에 건강에 특별한 이상이 없었던 지라 아쉬움이 없지 않았지만, 그토록 평안하게 돌아가신 것이 모든 듣는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옆자리에서 운전하던 남편조차 그냥 자는 줄만 알았었다니 말이다. 미스 조앤의 장례식은 어마어마 했다. 베이크빌에 있는 장례식장이었데, 그 넓은 주차장이 수백대의 차들로 꽉 들어차서 경찰관들이 교통정리를 해야 할 정도였다. 가난했던 시절부터 평생 동안 주변에 덕을 베푸신 훌륭한 분이었음을 그 장례식이 여실히 보여주었다.  

 

나와 아내는 미스 조앤의 장례식 날을 잊을 수가 없다.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주차장은 물론 길가까지 차가 빼곡히 주차되어 있었다. 주차장 안에서 외길을 잘 못 들어 앞 차들을 따라서 깊숙히 들어가게 되었는데, 장례식장 입구 가장 가까운 곳에 다다랐을 때 내 차 바로 앞에서 차 한대가 기다렸다는 듯이 빠져 나가는 것이다. 횡재한 듯이 편안히 주차를 하고 내리려는데, 담장너머 하늘에 구름의 모양이 너무 귀여웠다. 흡사 미스 조앤이 지으시던 천진한 미소처럼 포근하게 느껴져 얼른 핸드폰에 담아놨다. 미스 조앤이 주차 자리까지 예비해 두고 우리를 반기는 것 같았다.    

 

돌아보면, 그 인턴쉽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큰 아들 한웅이는 그곳에서의 경험을 대입 때 자기소개서의 소재로 쓸 만큼 영적으로 큰 영향을 받았고, 아내는 미국 온 뒤 10년 동안 친정 엄마에게 가까이서 받을 수 없었던 사랑을 조앤으로부터 받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곳에 가게 하신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나의 훈련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곳에서 꼬박 1년 동안 한주도 빠짐없이 매주 두번의 설교와 한번의 강의를 하기 전까지 턱없이 부족했던 영어 설교 및 강의 능력이 괄목상대할 정도로 나아졌다. 

 

하나님을 믿는 자의 삶 속에 우연은 없다. 예비하시는 하나님은 당신의 목적에 맞게 나를 훈련하시키기 위해 인도하고 계시다. 그 인턴쉽도 내게는 우연으로 보였지만,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의 필연의 한조각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