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온 뒤 빈번히 나를 괴롭히는 상상이 있었다. 부모를 잃은 한웅이와 한빛이가 보인다. 한빛이는 아직 유치원생 정도고 한웅이는 초등학교 2-3학년 쯤이다. 한웅이가 한빛이를 데리고 다니며 돌본다. 한웅이는 어른스럽게 상황을 이겨나가고 얌전한 한빛이는 형을 믿고 졸래 졸래 따라다닌다. 어떤 때는 다리 밑 같은 곳에서 배고프고 추운 밤을 맞기도 한다. … 이런 상상이 나도 모르게 백일몽처럼 머릿속을 스치고 나면 가슴이 미어졌다. 그때마다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간절히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아이들이 너무도 가엾고 또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태해지던 마음도 얼어붙듯 싹 사라지고 다시 죽으라 공부와 일을 했다.
신청했던 H1B비자가 거절된 후 심리적 압박이 절정에 다다랐던 것 같다. 21년 살면서 부부싸움을 너댓 번밖에 하지 않았는데, 그 때에 한 번 했던 기억이 난다. 두려운 마음을 둘 다 애써 참고 지내던 어느 날 미래에 대한 얘기를 하다가 다투고 말았다. 어려움 그 자체보다도 그것이 주는 심리적 압박이 사람에게 더 큰 데미지를 준다. 정신적인 고통에 비하면 육체적인 고통은 아무것도 아닌 경우가 많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아이들을 생각하면 그 압박은 더해 왔다.
한웅이는 나면서부터 생각이 바르다. 지금껏 단 한번도 누구에게 화를 낸 적이 없다. 누구에 대해 안좋은 말을 한 적도 없다. 그리고 부모에게 대든 적은 말할 것도 없고 말대꾸조차 한 적이 없다. 공부를 더 깊이 하고 싶다며 중3 때 시작한 풋볼과 보이스카웃을 고1때 스스로 그만 둔 뒤부터, 리서치를 하듯이 공부를 했다. 학교에서 배우는 것들에 만족하지 않고 더 깊이 알고 싶어했다. 고3을 마치고 4학년이 되기 전에 이사하지 않았었더라면 졸업생대표(Valedictorian)가 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던 아이였다.
한빛이는 한웅이와 성격이 다르다. 내성적이고 조용하고 어디에서도 눈에 띄거나 튀지 않았다. 너무나도 착해서 우리가족 넷 중에 가장 천사같다. 누구든 마음이나 몸이 아픈 것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여리고 아름다운 마음을 가졌다. 자신이 가진 것을 다 양보하고도 전혀 아까움을 느끼지 않는 아이다. 물론 공부도 열심이다—지금껏 단 한번도 A를 놓친 적이 없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다. 오히려, 다른 아이들에게는 당연한 것조차 해주지 못한 것들이 더 많다. 외국인이기 때문에, 그리고 고정적인 수입이 없는 학생이었기 때문에 등등의 핑계로 …. 마음이 아팠다. 그런데, 비자가 거절되어 생기는 문제들에 비하면 그런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예기치 않게 한국으로 갑자기 돌아가게 되면 그 아이들의 교육이 완전히 꼬이게 될 것이었다. 내게 그런 상상이 자꾸 나타났던 것도 그런 염려 때문이었던 게 아닌가 싶다. 사실 나와 집사람은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 그때나 지금이나 아무 문제가 없다. 문제는 스스로 선택해서가 아니라, 아빠와 엄마 때문에 오게 된 우리 아이들에게 나타날 것이다. 내가 공부하는 동안 많은 것을 희생해준 아이들에게 그런 extra의 고통을 주는 것은 … 상상만으로도 너무 괴로웠다.
그래서, 더 처절하게 비자 스폰서를 찾았다. 마지막으로 10여 군데의 교회에 레주메를 보낸후에도 계속해서 수소문을 했다. 그러던 10월 중순 경에 어느 미국 교회에서 연락을 받았다. 내 레주메를 받았다면서 이런 저런 질문을 하고 나서 검토하고 연락을 하겠다고 했다. 짧은 통화였다. 한군데서라도 연락 온 것이 기적같았지만, 그냥 의례적인 응답이 아닐까 하는 회의적인 생각이 더 컸다. 한국인을, 심지어 2세조차도 미국 교회에서 청빙한 경우는 그 때까지 없었기 때문이다 (그후 4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다).
별다른 소식없이 12월이 되었다. 비자를 신청했다가 거절당한 Calvary Hill Church of Christ의 장로들이 불렀다. 종교비자 스폰서를 하려면 반드시 갖고 있어야 하는 비영리기관 인증을 IRS에 신청한 지 1년이 되는 상황이었는데 감감무소식이었기에 혹시 다른 가능성도 찾아 보라는 말이었다. 그래서 내가 아는 유일한 한국인 Church of Christ가 있는 뉴욕을 향하게 되었다. 12월 23일에 출발해서 24일에 도착했다. 도착해서 맨하탄의 크리스마스 이브를 구경했다. 표지 사진은 그해 록펠러 센터 앞에 설치된 거대한 크리스마스 트리다. 뉴욕의 그 교회는 나를 청빙해 줄 의사는 커녕 진리에 대한 열정도 없다는 것만 확인하고 돌아나와야 했다.
마지막 가능성마저 사라진 후 마지막 기회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3박을 하며 여유있게 여행삼아 미시시피로 돌아왔다. 블루 리지 산맥을 달리는 경관 좋은 파크웨이를 타고 내려오다 버지니아 Roanoke에서 그해 마지막 해가 지는 것을 보고 50불짜리 모텔에 들어갔다. 저녁 7시 경, 낯선 곳에서 전화가 왔다. 10월 중순 경에 전화했던 그 교회사람이었다. 그가 말했다: “우리와 일하고 싶다면 우리가 너를 청빙하겠다.” 믿기지 않기도 하고 또 확인하고 싶어서 다시 물었다. “What?” 장로이자 담임 목사인 마이크는 또박 또박 다시 말해 주었다. 내가 그렇게 찾을 때는 나타나지 않던 스폰서가 그렇게 하늘에서 뚝 떨어졌던 것이다.
하나님은 나에게 계속 말씀하고 계셨던 것 같다, “가만히 서서 내가 베푸는 구원을 보라”고. 홍해를 가르시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셨듯이 말이다 (출애굽기14:13).
다음 날 새벽에 다시 블루 리지 파크웨이에 다시 올라 2014년의 첫 해돋이를 보았다. 마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는 듯이 그 아침은 상쾌했다. 집사람과 나는 미시시피까지 내려가는 내내 입이 마르게 하나님을 찬양했고, 신이 나서 그 동안 서로 마음 속에 담아 두었던 걱정과 근심은 물론 믿음과 기도들도 털어 놓고 나누었다. 얼마나 좋으신 하나님인가. 그러니 하나님을 믿고 아무 걱정도 하지 않았어도 되었던 것을 …. 믿음이 부족한 자들이여.
그러나, 스폰서를 보내 주신 것은 그 긴 기다림 동안에 베푸신 은혜의 처음 것에 불과하다. 우리의 믿음의 여행은 다음 주에도 계속 된다.
금주의 설교: 교만의 극치, 겸손의 극치
설교 듣기
설교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