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호--아내, 더 약한 그릇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다, “‘사모’(목회자의 아내)는 직분은 아니지만 그 어떤 다른 직분보다도 더 감당하기 힘든 것”이라고. 맞는 말인 것 같다. 목회자와의 관계 때문에 목회자의 아내는 목회자가 감당하는 것을 고스란히 같이 감당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목회자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소명과 사명을 가지고 있기에 어찌 보면 자신이 좋아서 하는 일이다. 그러나 목회자의 아내는 다르다. 사실 자신은 그런 삶을 원한 적이 없다. 다만, 남편에게 순복하며 살다 보니 그 어려운 일을 감당하기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을 뿐이다. 물론 어떤 사모들은 목회자 보다 더 강하고 목회자를 오히려 리드하기도 한다고 한다. 내 아내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어려서부터 현모양처로서 소박하고 평범한 삶을 꿈꾸던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튀지 않는 그런 사람이다. 그러나, 그런 그녀에게도 이 기다림의 고난이 주는 무게는 피할 수 없었다.
처음부터 아내는 그랬다. 아내를 처음 만난 것은 내가 대기업 기획실에서 일할 때였다. 멋진 잡이었다. 사보기획자라는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일이었다. 그룹 회장을 인터뷰하고 사장의 해외시찰 취재를 다니기도 한다. 기사를 취재 혹은 조사하기 위해 자주 여행을 다닐 수 있었다, 그것도 출장비로. 찌는 삼복 더위에도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해야 하는 본사의 다른 직원들과 달리 복장이 자유로왔다. 신나게 그 일을 하고 있던 어느 가을 추석에 집사람과 깜짝 선을 보았다. 초등학교 동창 사이인 아버지와 장모님이 동창회에서 만나 주선하신 자리였다. 미대를 나오고 나와 달리 발랄하고 구김살 없는 집사람이 맘에 들었다. 인물도 그만 하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둘 다 혼기가 찬 때라, 언제라도 청혼을 하면 결혼을 할 수 있는 때였지만, 일은 그렇게 되지 않았다... 신부를 맞기에는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장모님과 큰 처형의 간곡한 권유를 정을 땔 요량으로 매몰차게 뿌리쳤다. 마음이 아팠지만 유복하게 자란 사람을 대려다 고생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매월 받는 월급 80만원과 보너스 600프로가 전재산이었던 나에게 결혼은 정말 꿈이었다. “반딧불 초가집도 님과 함께면” 내겐 좋았지만 아내에겐 아닐 수 있었기에 아예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렇게 2년을 보냈다. 사표를 낸 후 6개월이나 월급을 꼬박꼬박 주며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려 주시던 이사님의 눈물어린 애원을 뿌리치고 사법고시 공부를 시작했다. 공대를 졸업했지만, 지금까지도 마찬가지지만, 그때도 전혀 이과적인 분야에서 일할 마음도 관심도 없었다. 법을 알아야 세상의 움직임을 알 수 있다는 단순한 생각에 사법고시를 택했다. 그리고 공부라면, 대학다니면서 잠시 멈췄었지만, 자신있었다. 고3때 복잡한 개인 사정으로 어그러지기는 했지만, 한 때 유력한 학력고사 전국 수석 후보이기도 했던 나였다.
고시공부를 하는데, 정말 외롭고 힘들었다. TV드라마에서 보았듯이 가끔 힘겨운 시름을 위로해주고 꿈을 함께 이루어 나가는 고향에서 금의환향을 기다려 주는 시골뜨기 아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할 정도였다. 무엇보다 평생 고생하며 살아오신 가난한 부모 보다는 미래를 함께 할 아내의 도움을 받는 것이 더 맘편할 것 같았다. 그런 저런 아쉬운 생각을 뒤로 하고, 서울대 도서관에서 문을 열 때부터 닫을 때까지 법과목 책들을 파기 시작하던 어느 날, 어머니가 올라 오셨다. 어머니는 고시 공부를 시작한 내게 별다른 말없이 한마디만 하셨다: “못 도와 줘서 미안하다.” 그러면서, 말씀하셨다. “딴 사람들은 결혼해서 고시공부를 한다던데, ... 아직 박양이 시집을 안갔다더라.” 내 부모님, 특히 아버지는 박양 즉 내 아내와 결혼하지 않으면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않겠다고 할 정도로 아내에게 청혼하지 않았던 것을 나무래셨었다. 직장을 다닐 때도 미안해서 청혼할 엄두를 내지 못했었는데, 그나마도 그만두고 고시공부를 하는 그때 … 그런데, 너무 힘들었었는지 말이라도 한 번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는 삐삐 시대였다. 전화번호도 수첩에 적어다녔었다. 해마다 수첩을 사서 200여 개의 전화번호를 관리했다. 아내의 경우와 같이 더 이상 전화할 일이 없는 사람은 당연히 지우면서. 아내와 만났던 해의 전화번호 수첩을 찾아 보니, 볼펜으로 까맣게 지워져 있다. 빛에 비추어 보니 대략 두어 숫자를 알아 볼 만 했다. 그 숫자들에 그 지역에 흔 한 국번호를 조합하니, 놀랍게도 아내의 친정집 전화번호가 어렴풋이 머릿 속에 떠올랐다. 조합이 약간 특이했었다. 일단 걸어 봤다. 맞았다. 어머니를 모시고 살던 처남이 받았다. 삐삐 번호를 남겨 놓았다. 그리고 그 다음 날인가 연락이 왔다. 아내 집 번호였다. 그렇게 해서 우린 2년 여 만에 다시 만났다. 두번째로 전주 어느 다방에서 만나 내 인생 계획을 간략히 말하고 3년만에 사법고시를 해낼 테니 결혼해서 도와 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아내는 망설임 없이 발랄하게 말했다: “그거 제가 하면 안 되요?” 그날이 1996년 12월 16일이었고 우리는 1997년 2월 2일에 결혼했다. 10여 년 고생하며 남편을 뒷바라지해 남편이 검사가 되어 잘 살고 있던 큰 처형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현모양처를 꿈꾸던 소박하고 순수한 마음이 더 크게 작용했던 것 같다.
앞서 말했듯이 (<반추 제9호>), 하나님의 계획이었는지, 딱 죽지 않을 정도까지 열심히 공부해서, 2년 만에 두 번의 사법시험 1차 시험에 합격했으면서도 당시에는 모두 불합격 통지를 받고, 그것이 바로잡혀서 합격 통지를 받은 것은 고시준비를 그만 두고 2년이 흐른 뒤였다. 이미 약속한 3년이 지났지만 고시에 안 되자 미련없이 그만두었고 친구가 제안하는 벤처 컨설팅 사업을 시작으로 사업의 세계에 뛰어 들었다. 처음 3년은 많은 고생을 했다. 제조업을 시작하면서는 전세금까지 다 투자하고 월세를 살았다. 하지만 아무리 어려워도 아내와의 약속을 지켰다--3년 후부터 평생 내가 먹여살린다는. 단 한 달도 약속한 생활비를 갖다주지 않은 적이 없었고 밖에서 내가 겪는 어려움을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집사람은 지금도 가끔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그 당시 어려웠던 얘기를 하면 전혀 알아채지 못한 것을 미안해 한다. 하지만 알았으면 뭐하랴, 실질적으로 도울 수도 없는 일인데. 사업이 안정화되어 아내가 원없이 맘대로 살 수 있는 때가 왔다. 결혼 한 지 한 7년 여 뒤의 일이었다. 어려서부터 돈 걱정없이 살았던 경제관념이 날카롭지 않은 아내는 당시에 자신이 얼마씩을 썼는지도 잘 모른다. 카드결제를 내 회사 경리직원이 처리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데리고 고급 백화점 가서 쇼핑하고 간식 먹고 동네 부유한 아이들 또래 엄마들과 수다떨고 …. 평생 그렇게 부잣집 사모님같이 살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나님은 아내에게 오래도록 그런 삶을 살도록 두지 않으셨다.
사업의 기복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 풍이 왔고 그것이 온전히 나은 지 1년 여 후 나는 하나님께 내 인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더 이상 세상적인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아내는 이번에도 발랄하게 선뜻 동의했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나아가서, 한국에 있으면 마음 약해질까봐, 이역만리 낯선 거리 미국으로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왔다. 상당한 금액의 돈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전에 살던 규모가 있어서였는지 그 돈은 3년 도 채 되지 않아 소진되었다. 어찌보면 그 돈이 빨리 사라지는 것이 우리에게 좋은 것이었다. 그래야 오직 하나님께만 의지하는 법을 배울 수 있으니까. 2009년 3월 말에 그 돈이 3천불 남기고 다 사라졌을 때, 아내와 나는 집에서 매일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가진 돈도 없고, 수입도 없이 살면서도 걱정과 슬픔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2016년 6월까지 7년여 동안 우리는 기적같이 살았다. 어디서 어떻게 돈이 생겼는지 일일이 말하자면 한도 끝도 없을 정도로, 어디선가 누군가가 어떻게든지 우리 삶을 지탱하게 해 주었다. 얼마 전에 <반추7호>에서 우리를 도와준 몇 분을 간략히 소개했지만 그건 정말 일부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그 약속을 지키셨다: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생활에 필요한 것)을 더하여 주시리라” (마태복음 6:33).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과정이 어렵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어려웠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 의심과 싸워야 했고, 아이들의 불투명한 미래를 보며 가슴을 쥐어 짜며 기도해야 했다. 아내는 더 했을 것이다. 내가 여기 저기서 사역자로서 거절당하거나 (미국인인도 아니고, 백인도 아니고, 나아가서 영어 원어민도 아니니) 차별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내는 남몰래 눈물을 훔치고 가슴을 쓸어내렸을 것이다. 사역자의 아내로서 사역자인 내가 감당해 내야 할 무게들을 함께 고스란히 감당하느라 여간 고생하지 않았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몸에 이상이 나타나는 체질인 아내는 그래서 병도 여러가지 앓았다. 선배 목회자 부부가 준 스트레스로 인해서 근육통(Fibromyalgia)이 생겨 지금도 가끔 괴롭히고, 미시시피에서 얼마 되지 않는 한국 가정들 틈바구니에서 스트레스를 받아 이름모를 피부병이 생겨 몇 달을 고생하기도 했다. 아틀란타로 이사와서 오바마 케어에 든 후에 처음으로 받아본 유방암 검사에서 양성판정을 받아 수술까지 해야 했던 것도 사역자의 아내로 살면서 받은 스트레스 때문인 것 같아 여간 마음이 아프지 않다.
아내와 나의 남은 소망은 작은 아들 한빛이 대학에 입학한 후에 자유로와 져서, 있으라고 하던지 떠나라고 하던지 어디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곳에서 사역을 하다가 한날한시에 이 세상을 홀연히 떠나는 것이다. 아내가 없는 나를 생각할 수도 없다; 또 아내도 내가 없는 자신을 생각할 수 없다고 한다. 정말 고맙다, 항상 나와 함께 해 주어서. 그러나 그 고마움에도 불구하고 감출 수 없는 것은 "더 약한 그릇"(베드로전서3:7)이기에 더 상처받고 더 아팠을 아내에 대한 미안함이다. 그에 대해 내가 보상해 줄 수 있는 것은 없다. 다만, 주님께서 아내에게 더 큰 위로를 주시길 기도할 뿐.
금주의 설교 가기: "서로 죄를 고백하고 기도하는 교회" (야고보서 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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