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호--여호와 이레 (1/2)

by 장민구 posted Mar 26,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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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예비하심을 두고 여호와 이레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그 자녀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신다는 것이 본래의 의미다. 하지만 만일 그것이 단순하게 어떤 것이 공급되어진다는 것만을 의미한다면, 그리 새로울 것도 없다. 왜냐하면 부모가 자녀들에게 필요를 공급해 주듯이 사람도 필요를 공급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여호와 이레라는 말이 성경에 처음 소개된 창세기 22장 14절의 경우에서와 같이, 여호와 이레라고 말하는 경우는 사람의 머리로는 예상치 못하는 신묘막측한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에 의한 것을 칭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람의 머리로는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문제가 해결될 뿐아니라 온전하게 해결되는 경우다. 물론 이 문제의 해결은 하나님의 자녀의 기도와 오래 참음의 결과다. 우리 가족의 종교비자를 받은 것이 바로 그 신묘막측한 여호와 이레의 한 예가 아닐까 싶다. 

 

비자신청 거절의사 통지(NOID)를 받은 후에 모든 문이 다 닫혔다. 모든 가능성은 다 가능하지 않은 것으로 판명이 나고, 결국 가장 가능하지 않은 즉 거의 불가능한 정말 작은 가능성만이 남겨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거절의사통지를 받은 후에 어필을 통해서, 그것도 2년이라는 긴 시간을 기다린 후에, 그 결과가 뒤바뀌는 경우는 통계상 3%이내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 2년 동안에는 합법적인 체류를 할 수 없으므로 미국 밖으로 나가야 한다. 정말 가능성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불가능에 가까운 것, 즉 희망을 걸어볼 수 있는 옵션이 아닌데 ... 남은 것은 그것밖에 없었다.

 

안타까운 것은 비자를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만이 우리 가족에게 남은 마지막 옵션이었다는 점이다. 그것마저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래 돌아가나 저래 돌아가나 한국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끝까지 해 봐야 하지 않겠는가? 왜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했는지 … 1월에 거절의사 통지를 받은 후 3월 말경까지 다른 모든 기대가 무너지고, 그 4월이 왔다. 4월이 지나고 5월이 오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상태로 2주가 지난다면 정말 끝일 것이었다. 60일 간의 grace기간을 갖겠지만 그것은 미국으로부터 이주준비를 위해 주어진 최소한의 시간이고, 한웅이는 고3으로, 한빛이는 중3으로 한국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무엇보다 먼저 마음을 비웠다. 한국으로 그렇게 돌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겸허하게 받아들이겠다고 다짐을 했다. 그로 인해 우리 아이들에게 지워질 무거운 짐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아이들도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을 믿었다. 이렇게 마음을 비우고, 집사람과 나는 마치 아무 특별한 일이 없는 것처럼 지내려 노력했다. 그래서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 가정이 비자 문제로 인해 그런 상황을 지내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하지만 동시에, 어필이 받아들여지게 하기 위해 필사적 노력을 했다. 그 지역 상원의원과 하원의원은 물론 스판서 교회가 있는 지역의 의원들에게도 편지를 썼다. 그리고 주변에 도움을 줄 수 있을 만한 사람들에게 부탁을 했다. 그러나 … 돌아오는 대답은 모두 다 그닥 신통치 않았다.  

 

중국계 미국인 거야오는 나의 가장 친한 미국 친구 중의 하나였다. 일주일이면 두 세 번은 만나거나 통화를 했고, 주말에는 가족들끼리 같이 식사를 했다. 그의 일이 해외 출장이 잦은 관계로 그렇게 못할 때도 많았지만 할 수 있을 만큼 했다. 거야오와 일본계 미국인인 그의 와이프 마사코가 함께 해외에 나갔을 때에는 아내와 나는 그 집 야드의 잔디를 깎아주었다. 그들은 귀국할 때 선물을 사와서 우리 가족을 초대해서 잔뜩 먹고 얘기하며 떠들썩하게 놀았다. 한번 같이 지낸 크리스마스에는 두 가족이 모두 그의 집에서 모여 저녁을 먹고, 어른들은 어른들 대로, 자녀들은 자녀들 대로 시간을 같이 보냈다. 그럴 때면 언제나 거야오는 종교비자 상황을 물었다. 나는 언제나 똑같이 “잘 되어 가고 있다”고 말을 했다. 굳이 내가 하고 있는 걱정을 그 친구에게까지 말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다. 혹은 해봐야 소용도 없을 거라고 생각을 했던지. 

 

거야오를 처음 만난 것은 그 전해인 2015년 10월 경이다. 그 학기 어느 날 나와 같은 수업을 듣던 매우 내성적인 일본계 미국인 젊은 여성이 있었다. 그 대학 일본어 프로그램의 디렉터였는데, 지독한 일벌레였던 그녀는 왠만해서는 다른 사람들과 대화도 잘 하지 않았다. 항상 혼자 다니는 그녀에게 친절하게 대해 줬다. 그래서 그랬는지 그녀는 나와는 대화를 그나마 좀 나누었다. 어느 날 뜸금없이 나오미가 전화를 걸어 내 아내에게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서 연락처를 하나 주었다. 바로 마사코의 연락처였다. 나오미와 집사람 그리고 마사코는 한두 번 만나서 같이 산책을 했는데 나오미와 마사코는 같은 일본계이면서도 친해지지 않았다. 결국 나오미는 더 이상 같이 못하고 아내와 마사코만 같이 만나게 되었다. 처녀시절 방송국 리포터를 할 만큼 인물이 단아한 마사코는 아내를 정말로 좋아했다. 마사코가 집사람보다 나이는 몇 살 위였지만 그 둘은 금새 좋은 친구가 되었다. 

 

거야오를 처음 만난 것은 그해 가을 추석 파티에서였다. 한국 유학생들과 일본 유학생들을 20여 명을 초대해서 한국음식을 해놓고 파티를 했다. 집사람이 마사코도 초대했던 모양이다. 마사코가 오면서 거야오를 데리고 왔다. 거야오는 매우 활발하고 긍정적이며 친절하고 대범한 사람이었다. 크리스챤은 아니었지만 덕스러운 사람이었다. 우리는 금새 친구가 되었다. 그의 오피스에 가서 같이 점심 도시락을 먹고, 차를 마시기도 하고, 학교 식당에서 같이 점심을 먹기도 했다. 한국의 유학원들을 소개해 주거나 내가 아는 한국 대학 교수들을 소개해 주기도 했다. 많은 유학생을 유치하는 것이 그 친구에게 중요했다. 한국 출장을 갈 때는 서울의 어느 어느 음식점에 가서 무슨 무슨 음식을 먹어보라고 가르쳐 주었다. 한국 여자들에게는 “예쁘네요”라고 칭찬을 해 주라는 것도 가르쳐 주었는데, 코엑스 안내를 하는 여자분에게 말해봤는데 매우 반응이 좋았다고 했다. 그렇게 거야오와 나는 급속히 베스트 프렌드가 되었다. 지금도 언제든지 전화를 하면 그는 “안녕하세요” 라고 너스레를 떨며 전화를 받는다. 언제나 항상 “꼭 다시 만나자”, “놀러와라”, “오면 같이 뭘 하자”는 등 얘기를 한다. 피를 나눈 형제들보다 더 살갑다. 마사코 또한 아내에게 마찬가지다. 

 

졸업이 가까이 오면서, 유학생들에게 비자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아는 거야오는 내 비자 상황에 관심을 가졌다. 항상 나는 약간의 문제는 있지만 잘 될 거라고 말했고, 거야오도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잘 될 거라는 말을 해 주었다. 거야오는 그리고 혹시라도 잘 안 되면 자신이 펀딩을 해서 OPT 기간 동안 유급 인턴 자리를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앞서 말했듯이 OPT도 6개월 밖에 할 수 없었기 때문에 큰 도움은 되지 않을 터였지만 그래도 고마웠다. 그렇게 까지 신경을 써주고 항상 긍정적인 생각을 하도록 도와주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정말 큰 힘이 되었다. 하지만, 그게 다라고 생각하면, 그런 말도 그다지 큰 위안은 되지 못했다. 

 

아무런 변화가 없이 4월 말이 되었다. 대학원 동기들 모두 마지막 학기를 마무리하고 졸업을 준비하는 데 바빴다. 이력서를 내는 친구들, 박사과정을 알아보는 친구들, 등등. 나도 바빴다. 리서치 페이퍼 3개를 마무리해서 내야 했고, 3과목의 기말고사를 준비해야 했다. 10년째 대학원생인지라, 그런 일정 관리는 누워서 떡먹기였다. 그 보다 큰 문제는 비자였다. 5월 첫째 주 기말고사가 끝나고 둘째 주에 졸업식을 하고 나면 기다릴 수 있는 시간은 사실상 끝이다 … 정말 끝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ESL학생들 영작문 튜터링을 하려고 그 장소에 가 있었다. 나와 함께 하는 대학원 동기 메이시도 와 있었다. 기말고사 기간인지라 학생들이 없었다. 그럴 때는 메이시와 얘기를 나누곤 했다. 졸업이 다가오는 때인지라 자연스럽게 졸업 후 진로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었다. 얘기 끝에 메이시에게 혹시 비자 문제를 도와 줄 만한 사람을 아느냐고 물었다. 메이시는 자기는 잘 모르지만, 이 학교의 유학생 담당 오피서를 찾아가 보라고 말했다. 대학 직원인 엄마에게 전에 그런 오피서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그 사람이 바로 거야오, 내 둘도 없는 친구였다. 내 가장 친한 친구가 나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정말 이상하게도 단 한 번도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바로 그날 처음으로 거야오에게 자세한 사정을 말했고, 도와 줄 방법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워싱턴 이민국 본부에서 일하는 높은 직위의 친구가 있다면서, 당장 이메일을 써서 자기에게 보내라고 했다. 그 이메일을 작성한 게 4월 25일 이었다. 그리고 거야오가 그 이메일을 그 친구에게 보냈다고 텍스트 메세지를 보낸 게 4월 26일이었다—정확히 그 10년 전인 2006년 4월 26일, 나는 하나님께 남은 인생을 바치겠다고 서약했었다. 이메일을 보낸 뒤로 거야오는 그에 대해 가타부타 아무 말이 없었다. 아마 허튼 희망을 주었다가 더 크게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았을 게다. 하지만, 언제나 같이 말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Minku, don’t worry. You deserve it (민구, 걱정하지 마라. 너는 그것을 받게 되어 있어).” 

 

2016년 5월 6일 모든 학사 일정이 끝났다. 5월 7일 토요일 저녁 어둑어둑해질 무렵 아내와 함께 주말 드라마를 보며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신세가 그래서였는지 그때는 드라마를 보면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바로 그 때 핸드폰에 한 메세지가 떴다: “Your R-1 application was approved (당신의 종교비자가 승인되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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