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호--기다림의 의미
드디어 봄이로다. 한국에 있을 때는 봄이면 가족들이랑 봄 소풍을 가곤 했었다. 특별히 기억나는 곳은 개그맨 김병만씨의 고향이기도 한 전북 전주 근교의 화산이라는 곳이다. 산들이 높진 않지만 산골이라서 공기도 좋고 물맑은 작은 개울들이 있어 풍광도 즐기고 삼겹살도 구워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 큰 아이 한웅이가 세살 쯤 되어서 아장아장 제법 걷기 시작할 때에도 갔던 기억이 난다. 빨간색 레인코트를 입고 좋아서 이리 콩콩 저리 콩콩 뛰어 다니는 한웅이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
한웅이는 물을 좋아했다. 길을 걷다가도 물 웅덩이가 있으면 기어이 물을 밟아야 했다. 그 소풍날에도 한웅이는 물에 들어가고 싶어 했다. 하지만 날씨가 아직 쌀쌀했기에 그렇게 놔 둘 수는 없었다. 그래도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게 해 줄 요량으로 나는 양말을 벗고 바지를 걷어올리고 물 속에 들어가서 큰 돌 덩어리들을 옮겨 징검다리를 만들었다. 세살배기 아기가 아장아장 걸어도 미끌어지거나 넘어지지 않도록 촘촘하게 그리고 혹시 빠지더라도 별일 없도록 바닥이 얕고 모래가 많은 곳에 …. 그렇게 하고도 나는 한웅이의 손을 잡아주고, 엄마는 한웅이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 그렇게 한참을 한웅이는 사촌들과 신나게 물위를 걸으며 놀았다.
29개월 … 비자를 신청하고 애타게 기다린 기간이다. 처음 스판서를 찾는 과정까지 합하면 약 36개월. 지금와서 돌아보면 분명한 것은 그 3년 동안의 고통스러웠던 기다림은 그냥 흘러간 시간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 3년은 내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미국에 온 뒤로 받은 가장 중요한 훈련이었다. 기다림을 훈련받은 것이다. 어떤 사람이 말했듯이 기다림은 사람에게 가장 어려운 일이다. 기다림을 어렵게 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의 불확실성이다. 그 기다림 끝에 무엇이 올 지를 모르기 때문에 기다림이 어려운 것이다. 한국행 대한항공 비행기표를 끊어 놓고 그 비행기를 기다리는 것이 어렵지 않은 이유는 그날 시간이 되면 비행기가 뜰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확실한 결과를 기다리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그런데, 만일 어머니가 위독하셔서 10년 만에 가는 것인데, 그 사이에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모른다면? 같은 시간이지만 그 기다림은 지옥과 같을 수있다. 이렇듯 그 결과의 불확실성이 기다림을 고통스럽게 한다. 그 어려운 기다림은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속을 걷는 것과 같다.
그 어려운 기다림을 훈련받았다? 하나님은 왜 우리를 기다림을 통해 훈련시켰을까? 불확실한 미래를 흔들림없이 기다리게 해주는 것, 바로 그것이 믿음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을 훈련시켜 주신 것이다. 그것도 아주 찐하게. 믿음이라는 말로 변역된 구약성경 히브리어 원어 중 하나는 ‘바타크(btk)’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마지막 순간에 언급하신 시편 22편의 키워드이기도 하다 (5, 6, 10절). 하나님께 자신의 신뢰를 둔다는 뜻이다. 즉 하나님께서 분명하고 좋은 미래를 주심을 믿는다는 의미다. 이런 의미에서 믿음은 소망의 또 다른 표현이다 (로마서 8장24절이 소망이 우리를 구원했다고 말하는 이유다). 그 단어의 의미를 영어로 표현하자면 “to find certainty (in God)”이다. 어떤 현실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 과정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겨나갈 때 하나님께서 장차 확실한 미래를 가지고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 바로 이 단어가 의미하는 믿음이다. 따라서 어렵고 지루하고 견디기 힘든 기다림의 과정은 이 믿음을 키우고 훈련하기 위한 과정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그 기다림의 과정은 하나님께서 놓아 주신 징검다리다. 내가 그 과정을 통해서 믿음의 성장이라는 건너편에 다다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친히 놓아주신 징검다리—마치 내가 세살배기 한웅이를 위해 양말을 벗고 바지를 걷어올리고 조심스레 고른 큰 돌들을 들고 발을 시리게 하는 물속에 스스로 들어가서 안전한 자리들을 찾고 미끄러지거나 넘어지지 않을 만큼의 간격을 맞춰 하나하나 놓아 주었듯이, 하나님께서 친히 골라서 신중하게 놓아주신 징검다리. 그리고 보면, 그 기다림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닐 수 없다. 히브리서 12장에서 말씀하신 것이 바로 이것이 아닌가? 징계는 받을 당시에는 즐겁지 아니하지만 하나님은 진정 사랑하는 자녀들을 징계하신다 (히브리서 12:7-8,11).
그러므로, 지난한 기다림은 하나님의 축복이다. 내가 도체 뭐관대 하나님이 친히 나를 성숙시켜 주시기 위해 찬물에 발을 걷어 부치고 들어가셔서 돌다리를 놔 주신단 말인가? 어찌 이 사랑을 축복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다. 그 징검다리를 깡총깡총 뛰어서 건너편에 다다르게 해 주시는 그것을 어찌 축복이 아니라 고난과 환란이라고만 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하나님의 그 지극하신 정성과 사랑으로 나를 위해 특별히 예비하신 이 상황들이 내 생각과 다르다고 혹은 좀 견디기 어렵다고 어찌 그것을 축복으로 감사하지 못하고 불만과 불평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이 기다림을 통해서 훈련을 받아야 할 수밖에 없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고 인내를 이루지 못하고서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그 천국의 유업을 상으로 받을 수 없다. 따라서 그 믿음이 있어야만 구원을 이룰 수 있다. 미천하고 보잘 것 없는 내가 구원을 이룰 수 있도록, 그 믿음을 버리지 않고 키워 나가도록, 그렇게 세심하게 디자인해서 통과하게 하신 그 상황들 … 바로 하나님의 지극하신 사랑이다.
믿음은 어떤 어려운 상황도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이라고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이다. 우리 가족에게 있어서 그 36개월은 그런 상황이었다.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결국은 그 과정이 하나님께서 우리 가족을 위해 예비하신 축복임을 깨닫고 인내와 감사함으로 견디고 이겨낼 수 있게 되었다. 우리의 믿음이 한 단계 성숙을 이룬 것이다.
기다림은 그냥 기다림이 아니다. 그것은 믿음의 훈련과정이고 하나님과의 동행이며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의 장이다. 결국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과정이다. 그러니, 그 과정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중한가? 그 축복의 과정을 주시는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리로다.
그런데, 한만디만 더 하자면, 돌아보면 그 징검다리도 사실은 내 발로 뛰어 건넌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께서 친히 나를 그 등에 업어 건네주셨음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 하나님은 돌다리를 놓아주시고, 예수님은 나를 등에 업어 건네주신 것이다. 오 나의 주님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이시어 무궁한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하지 않을 수 없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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