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셜클럽, 인맥쌓는 곳, 마케팅의 장, 대중집회장, 음악 콘서트장, 장기자랑 무대, 자아실현의 장, 봉사활동, 자녀 배우자 찾는 곳, 한글 학교, 노인회관 혹은 복지센터 등등. 이민 사회에서 한국 교회들에 대한 묘사다.
이민 '교회'의 실상
처음 비행기에서 내려서부터 도움이 필요한 이민자들을 그 지역에 정착할 수 있도록 무료로 도와주는 곳. 낯설기만 한 미국에서 친구를 사귀고 이웃을 맺는 곳. 사업을 알아보고, 비즈니스를 사고 팔고, 잡을 잡고, 고객을 유치하는 곳. 어느 정도 적응이 되면 일주일에 한 두 번씩 친구를 만나고 또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곳. 집사가 되고 권사 장로가 되어 감투를 쓰기도 하고 사회적 욕구를 실현할 수 있는 곳. 아이들에게는 한글공부를 시켜주고, 특송을 발표할 기회를 주고, 봉사활동 크레딧을 쌓는 곳. 노인들에게는 경로당이 되어주기도 하는 곳. 일주일 동안 지친 마음을 위로해 주기라도 하려는 듯 음악 콘서트를 여는 곳. 나아가서, 장성한 자녀들의 배우자를 물색하는 곳. 그리고 목회자나 미니스터들에게는 직장.
이민 교회는, 이렇게 다양한 요구를 해소해 주는 한인 커뮤니티다. 작은 교회들은 따라서 택도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결국 큰교회로 큰교회로 발걸음을 향한다. 일주일 동안 맞벌이에 각자 바빠 얼굴 볼 시간 조차 없었던 가족들은 일요일이 되면 같은 차를 타고 차안에서 잠시 얼굴을 보며 교회로 간다. 주차장에 내리자마자 아버지는 남성봉사회로, 어머니는 식당으로, 오빠는 청년부로, 동생은 유소년부로 … 뿔뿔이 흩어진다. 예배 시간 … 어머니는 성가대, 아버지는 헌금봉사, 자녀들은 각각 청소년 예배에 있으므로 예배시간에 가족은 함께 하지 못한다. 그래도 누구 하나 이런 걸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모두 다 본래부터 그러려니 한다.
웅장한 오케스트라의 연주와 천사의 목소리라고 믿고 들어주어야 하는 성가대의 합창 등 볼거리들이 설교 전 무대 좌우를 메운다. 또 청소년 찬양단이 나와서 신나게 전자기타와 드럼을 두들기는 락 사운드에 혼이 빠진 건지 성령이 충만해진 건지 어찌되었건 희열을 느낀다. 그리고 천사의 미소를 가진 담임 목사의 ‘대중 연설’이 시작된다. 모두 숨죽여 듣고 있는데, 친절하게도 가끔씩 ‘아멘’ ‘아멘’ 하는 추임새로 깜짝 깜짝 졸음을 쫓아주기도 한다. 설교가 끝날 즈음에 목사님의 축도는 받아야 한다. 다른 건 다 안 받아도 이것은 빠지면 안 된다. 이걸로 또 다가오는 전쟁같은 일주일을 ‘은혜’로 버틸 수 있기 때문이다. 축도가 끝나면 식당에 준비된 음식이 궁금해진다. 삼삼오오 친한 사람들—사회적으로 비슷비슷한 사람들— 끼리 앉아서 담소를 즐기며 식사를 마치고 오랫동안 얘기가 계속된다. 정보도 교환하고, 입소문을 듣기도 하고 내기도 하고, 또 본래 그 교회에 가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사람들을 가능한 한 다 만난다. 몸도 마음도 지치고 편안한 집안의 소파가 그리워질 즈음에 차로 가면 다른 가족들도 속속 모인다. 그리고 월요일을 위해 쉬러 드디어 집에 간다.
없으면 안된다! 이렇게 중요한 사회활동을 하지 않고 어떻게 이 빡빡한 이민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한국 교회, 그것도 큰 교회에 나가지 않고서는 비즈니스도, 정치활동도, 그리고 병원도 학원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얼마나 귀중하고 소중한 소셜클럽인가. 이런 클럽을 만들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가 얼마나 감사한가. 이런 클럽이 움직여 나가게 해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가.
현재 ‘교회’는 소셜클럽으로 그냥 즐겨라!
그러나 거기서 구원을 찾으려 하지 말라!
좋다. 백번 양보해서 이민 사회의 특성 상 이런 소셜클럽의 역할을 하는 ‘교회’라는 이름의 대중들의 만남의 장이 필요하다고 인정한다 치자. 그러나 한가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다. 아니,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그런 사교 활동의 장에서 구원을 찾기는 쉽지 않다는 점이다. 그런 사회적인, 세상적인, 정치적인 클럽에서 진짜 구원에 대해 배우고, 진짜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진짜 구세주를 영접하고, 진짜 믿음을 갖게 되고, 그래서 진짜 구원을 이루어 나가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만일, 그런 세상적이고 사회적인 즐거움 혹은 책임감에 흠뻑 빠져 있는 것을 구원을 이루어 나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 그건 착각일 가능성이 크다.
구원을 위한 교회가 아닌 소셜클럽
예수님께서 친히 보여주시고 가르쳐 주시고 나아가 명령하여 행하라 하신 것과 같은 것이 그런 ‘교회’에 단 하나라도 있는가. 예수님이 언제 소셜클럽을 만드셨던가. 예수님이 언제 자아를 뽐내기 위해 장기자랑을 하라 하셨던가. 예수님이 언제 오케스트라를 동원해서 찬양을 하고, 그룹사운드를 동원하고, 웅장한 성가대를 만들어 부자연스러운 옷을 입혀 찬양을 하게 하셨던가. 더우기 몇몇 사람은 앞에 나가서 하고 어떤 사람들은 구경만 하게 하셨던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 전하는 것을 밥벌이로 생각하신 적이 있던가. 예수님이 복음을 듣기 위해 사람들이 모였을 때 비즈니스를 하라 하셨던가. 오히려 성전을 채우고 있던 장삿꾼들의 좌판을 채찍을 만들어 뒤집어 엎어버리지 않으셨던가. 예수님의 말씀에 집중하지 않고 정신없이 봉사하던 마르다를 오히려 말리지 않으셨던가. 이미 이민사회에 없어서는 안 될 거대한 소셜클럽이 되어버린 교회들이 하는 것들 중에 단 하나라도 예수님께서 그 제자들과 함께 행하신 것이 있다면 어디 한 번 가만히 눈감고 손꼽아 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곳에서 찾은 즐거움이 구원이라고 순진하게 믿는다면, … 안타까운 일이다. 이혼, 음주, 음주운전, 약물남용 및 중독 등 이민 사회에 팽배해져 가고 있는 문제들을, 몇명이라도 ‘교회’를 떠날까봐 언급조차도 못하는 데, 어떻게 그로 인해 곪아 썩어가고 있는 아픈 가정들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겠는가. 정녕, 그런 상처는 그대로 둔 채로 ‘교회’라는 간판만 화려하게 붙이고, ‘주여 주여’만 외치면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가. 그런 상처와 아픔을 치유해 주기는 커녕 덜어주지도 못하면서도, 구원을 논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순진함인가 무지인가.
구원을 찾을 곳에서 찾으라
그러므로, 구원은 그것이 있을 만한 곳에서 찾으라! 주일이 아니라 언제라도 구원을 진정으로, 가식으로가 아니라, 착각으로가 아니라, 마음으로 열망하는 친구들을 찾으라. 그들과의 교제에서 구원을 찾으라. 그들과 함께 속내를 터놓고, 함께 울고 함께 웃으며, 아픔을 나누고, 서로 상처를 어루만져 주고, 친밀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함께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찬양하고 기도하며 구원을 맛보라. 헌금도 필요없고, 십일조는 더 더욱 필요없다. 오직 구원을 열망하는 사람들의 열린 마음과 믿음의 토론과 함께 하는 사랑의 동행이 필요할 뿐이다. 그들은 서로 경쟁하는 교인이 아니다; 서로 양보하고 위해주는 친구고 자매고 형제다. 목사는 대중 앞에 서서 연설하고 축도와 함께 무대 뒤로 사라진 후 일주일 내내 바빠서 개인적인 대화 한번 할 수 없는 ‘저 위에 있는 리더’가 아니다; 한 사람의 친구이고, 한 사람의 형제이고 더 섬기고 더 낮아진 주님을 더 닮은 한 사람이다.
매주가 아니어도 좋고, 꼭 일요일이 아니어도 좋다. 그들과 만날 수 있는 대로 만나고 대화하고, 함께 웃고 함께 울고 나면, 세상의 시름이 작아지리라. 믿음은 커지리라. 세상을 이길 힘이 생기리라. 혼자가 아님을 알고 든든함을 느끼리라. 이런 게 진짜 구원의 길이구나, 이런 것을 주님의 몸된 교회라고 하는 것이구나 싶은 생각이, 남몰래 엷게 비친 미소와 함께 떠오르리라. 이런 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기쁨이고 감사함임을 깨달으리라. 자신이 그렇게 변화해 나갈 때 가정이 평안해지고, 아이들이 바르게 자라고, 배우자가 변화하리라. 이것이 바로 구원, 즉 매주 주일날 가서 한바탕 돌고 오는 소셜클럽에서는 찾기 힘든, 아니 어쩌면 거기에는 없는, 주님이 주시는 안식이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