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호--덕유산 해돋이
신기한 일들이 있다. 사람의 머리로는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간혹 일어난다. 지금까지 살면서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그런 일이 일어났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그 결과로 볼 때 신기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의 잠재의식 때문인지, 아니면 영적인 세계의 작용 때문인지 … 원인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 결과로만도 놀라운 일이다. 시간이 한참 지나서 이해력이 더 자란 후에 돌이켜 볼 때 더욱 더 놀라게 된다. 2005년 1월 1일 새벽 덕유산 해돋이를 보면서 있었던 일이 그런 일들의 첫 기억이다.
12월은 다른 때보다 더 힘들었다. 내 회사에 납품을 하는 업체들도 12월이 가기 전에 수금을 하려했고, 또 직원을의 연말 보너스 등도 추가적인 부담이었기 때문이다. 사업이 어려운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 와중에, 노키아 이사 정호 형님이 가족 여행을 제안했다. 무주로의 해돋이 여행이었다. 정호 형님이 동생처럼 여기는 다른 한 분의 가족과 함께였다.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집에 있어야 특별히 할 일도 없었고,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좋겠다 싶었다.
좋은 공기와 맛있는 음식들, 온천, 실내 물놀이 공원 등 즐길 만한 것들이 많이 있었지만 내 마음은 신나지만은 않았다. 일 중심적 사고를 하는 성격인 나는 안 풀리는 일을 두고 신나지 않는다. 더우기, 우리 아이들의 미래에까지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상황이다 보니 더욱 그랬다.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애써 노력을 했다. 우리 가족들의 기분을 망치지 않기 위해서도, 함께 온 다른 가족들의 기분을 위해서도 그래야만 했다. 아무리 노력을 했어도 완전히 감출 수는 없었겠지만 그래도 노골적으로 내 기분에 따라 행동하지는 않았다.
정호 형님은 매일 아침 산에 오르는 분인지라, 산을 좋아했다. 12월 31일 밤 늦게까지 가벼운 술자리를 하며 모두 같이 시간을 보냈다. 정호 형님이 새해 첫 해돋이를 보러 가자고 했다. 여자분들은 기겁을 하며 아예 생각도 하지 않아, 남자들 셋만 가게 되었다. 나도 해돋이를 보는 것을 가끔 즐기던 편이어서 그리 나쁘지는 않았지만 영하 섭씨 20도까지 내려간다는 것을 들었으므로 꺽정스러웠다.
중무장을 하고 새벽 4시에 출발했다. 영하 10여 도의 추위에도 불구하고 케이블 카 승강장에는 엄청난 인파가 몰렸다. 전국에서 덕유산 새해 첫 해돋이를 보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었다. 한참 실랑이를 하며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겨우 탑승했다. 십여분 칠흑같은 어둠 속을 대롱대롱 매달려 윙윙거리며 올라간 후에, 문이 열리자마자 눈발 섞인 바람이 쓸려 들어왔다. 눈은 많이 오지 않았지만 바람은 칼날같았다. 어느 건물 벽에 설치된 온도계가 영하 19도를 표시하고 있었다. 가만히 서있을 수 없을 정도였다. 몸을 녹일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사람들이 모여있는 뒤에 서서 바람을 좀 피해보려 할 뿐. 또 시간은 왜 그렇게 안 가는지.
어느 덧 시간이 되었다. 사람들이 동쪽을 향해 몰렸다. 사람들의 틈바구니를 뚫고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눈보라는 멈추지 않았다. 해돋이를 보기 위해 좋지 않은 기상에도 불구하고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거기까지 올라온 사람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는 짖궂은 날씨였다. 그러던 중에 사람들의 아우성 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한 켠에서 빛이 올라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구름과 눈보라 때문에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멀리서 희뿌염한 빛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들이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 함성소리에 힘을 얻은 듯 빛이 갑자기 급속도록 환해지기 시작했다. 구름이 걷힌 탓이었다. 그 뒤로 해가 나올까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들의 함성소리는 더욱 커졌다. 그러나, 그 빛조차도 금새 다시 수그러 들고 말았다.
가만히 서서 짧은 사이의 그 빛의 변화를 보고 있던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래 기도를 하자. 이럴 때 기도를 한다는 사람들의 말을 들은 적이 있지 않은가?’ 나는 어떻게 기도를 해야 할 줄도 몰랐지만, 그 시간을 기념하여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나도 놀라는 그런 일. 내가 기도를 하는데,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고, 잘 알지도 못했던 그런 기도를 내가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기도는 ‘사업이 다시 잘 되게 해달라’는 것도, ‘내가 건강을 회복하게 해달라’는 것도, ‘우리 가족을 축복해 달라’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아니 내 안에서 누군가 하고 있던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 저에게 성령을 주시옵소서” 였다.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인지, 그게 무슨 의미인지,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 것인지도 모르는 그런 기도를, 내 안에서 누군가가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나도 모르게 그 기도를 내가 한 것이다.
이후에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할 때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로마서8:26). 나에게 일어난 일이 그것이었는지는 확실히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기도를 한 것은 나 자신, 나의 의식, 혹은 나의 생각은 아니었다. 아마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돕기 위해 성령님을 통해 친히 해주신 기도였던 것 같다.
그때는 그 의미를 몰랐지만, 그것은 나의 삶에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그것은 비록 부족하나마 나의 믿음의 결단과 순종을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신 것이다. 성령은 순종하는 마음으로(사도행전5:32) 복음을 듣고 회개한 자들에게(2:38) 즉, 믿는 자들에게(요한복음7:39)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사도행전2:38)이라고 성경이 분명히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성령님의 기도였다고 확언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만일 그날의 그 기도에 응답으로 그 후에 언제든지 성령님이 내 안에 사시기 시작했다면 그것은 내가 믿음으로 순종하고 회개함으로 세상적인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말이다.
그렇게 믿음과 순종을 통해서 내주하기 시작하신 성령 하나님은 그 사람을 변화시킨다.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은 그 사람을 예수님의 삶에 점점 더 순종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성화(sanctification)라고 한다. 성화는 성령으로 육체의 욕망을 따르는 삶을 죽이고(로마서8:13) 날마다 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으로 성숙시켜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성화가 곧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이다(같은 절). 이렇게 하나님의 영 즉 성령으로 사는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한다(8:14). 이는 마치, 아버지가 어떤 그룹의 회장인 가족이 있다면, 현재 회장인 아버지를 가장 존경하고 그 아버지의 그룹 운영의 철학을 가장 잘 이해하고 따르는 자녀가 그 아버지의 후계자가 되어 회사를 운영하게 되는 것과 같다. 그 후계자에게 있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경영철학과 소신이 성령에 비유될 수 있다.
성령을 크리스챤이 갖는 새로운 영원한 생명이라고 한다 (로마서8:9-11). 이 성령이 그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일 뿐아니라 종으로 살게 한다 (이사야61:1; 누가복음4:18).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니, 어찌 하나님의 영이 없이 가능하겠는가 (사도행전 10:38)? 이토록 중요한 성령을 받게 하기 위해서였나? … 그 기도를 하나님께서 내게 강권적으로 하게 하신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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