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돌아가셔야만 했을까?”
내가 믿음을 갖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된 의문이었다. 믿음을 갖고 싶었지만, 이 의문이 해소되지 않았기에 믿어지지가 않았다. 이 의문 때문에, 복음이 뭔가 사람이 지어낸 것이 아닌가라는 의혹이 계속해서 머리속을 맴도니 어찌 믿을 수 있었겠는가? 하나님은 전능하다고 하면서도, 그 아들인 예수는 죽어야만 했다? 그것도 십자가에 못박혀 처절하게 죽어야만 했다?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았다. 내가 하나님이라면 과연 내 독생자를, 그것도 아무 죄도 없는 온전히 의로운 아들를, 악인들의 손에 죽게 내버려 두었겠는가? 아무리 나중에 부활했다지만, 죽지 않고 하늘로 옮겨진 에녹이나 엘리야도 있는데, 왜 그 독생자는 그 고통스러운 죽음을 죽게 해야만 했을까? 그 의혹이 내게 믿음을 가로막고 있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 이에 대한 명확한 답을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음을 이제는 안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게 된 과정과 내가 믿게 된 과정이 다르겠지만, 그것이 믿음을 방해할 수 있는 핵심적인 의혹인데도 그에 대해 생각조차 해보지 않고도 믿음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베드로도 그랬다. 예수님이 왜 그렇게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감람산에서 예수님이 붙잡히실 때에 칼을 빼어들고 대제사장의 군병 마커스의 귀를 자른 것이다. 그에 대해 예수님은, 하나님께 말하여 12개 연대의 천사들이라도 부를 수 없어서 이러는 것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칼을 거두라고 하시고 그들의 더러운 손에 자신을 맡기셨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고초를 당하시고 죽으셔야만 하는 이유를 베드로는 예수님의 승천 이후 성령이 임하시기까지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 후에도 그는 다른 6제자들과 함께 타이베리아 바다에서 고기잡이로 돌아갔던 것이다 (요한복음21:1-2).
안타까운 것은 누구도 그런 의문에 대한 답을 알려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니 못했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장유 지성전의 김 부목사에게 질문을 했지만 이해시켜 주지 못했다. 그분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돌아가셔야만 했기 때문에 그랬다고 했다. 그러니까 그 죄를 해결하는 방법이 왜 하나님이 전능하므로 다른 방법을 택할 수 도 있는데 왜 그 독생자의 모진 고초와 잔혹한 죽음이어야만 했느냐는 것이었는데 그분은 내 질문의 핵심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당회장 목사의 설교들을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지만 그에 대한 답은 찾을 수 없었다. 나 자신의 성경에 대한 이해는 물론 아직 그것에 스스로 답을 찾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었다. 사실 성경을 전공하기 시작한 후에도 한참이 지나서야 나는 그 답을 알게 되었다.
참으로 답답했다. 예수님을 어린 양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구약시대의 제사와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나에게 확신을 주지 못했다. 왜냐하면, 왜 예수님이라는 어린 양의 희생은 모든 사람들의 죄값을 치를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여전히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이 왜 반드시 어린 양이 되어서 죽는 방법밖에 없었는가 하는 점에 대한 의혹은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었다. 믿음을 오지 못하게 막고 있는 그 의혹이 목구멍에 걸린 가시같이 답답하고 아프게 나를 콕콕 찌르고 있었다. 처음에 생각했던 것처럼, 나는 믿음을 가질 수 없는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도 답답하게 지내고 있던 어느 날 나는 어떤 설교를 들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떠날 때에 어디로 갈 바를 몰랐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을 가졌다는 것이 설교의 포인트였다 (히브리서11:8). 그 자체가 내 의문에 대한 답은 아니었다. 그러나 믿음에 대한 태도를 가르쳐 주는 말씀이었다.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이 그런 것이라면 그것을 따르던지 아니면 믿음을 포기하던지 둘 중 하나밖에 없지 않은가? 나는 … 그냥 순종하기로 했다. 그 말씀이 가르치는 그 태도를 갖기로 했다. 왜 전능하신 하나님은 그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 위에서 죽게 하는 방법을 택하셨을까에 대한 의문을 일단 접어 두기로 했다.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냥 ‘그렇게 되었구나’ 하고 믿기로 작정했다. 사실은 믿기로 작정을 했다기 보다는, 더 이상 의혹을 품지 않기로 결심을 했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믿음은 스스로 찾아 나갈 수 밖에 없다. 언젠가 하나님의 때가 이르렀을 때 믿음이 생길 수도 있고, 영영 하나님의 때가 이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믿음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가진 의문들에, 성경을 통해서 답을 해주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사도행전 8장에 이디오피아 내시가 나오는데 그는 이사야서 53장을 읽고 있었다. 그는 그 고난을 당할 사람이 선지자 본인인지 아니면 다른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34절). 빌립 집사는 그의 그 의문에 대답하면서 그에게 복음을 전했고 (35절) 이디오피아 내시는 그 성경공부 후에 세례를 받고 크리스챤이 되었다 (38절). 많은 분들이 말하듯이, 이 이야기는 성경공부의 중요성을 말해준다. 그런데, 나는 이 이야기의 더욱 중요한 포인트는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복음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의 도움이 얼마나 중요한 가 하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복음을 올바로 깨달은 사람들이 감당해야할 것은, 많은 의혹들에 가로막혀서 믿음으로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가진 의문들에 답을 해 주는 것이다. 그런 성경선생 즉 영혼의 목자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따라서 얼마나 복된 일인가? 자신이 듣고 싶은 말을 해주고 그 댓가로 세상적인 이익이나 얻으려 하는 거짓 가짜 목사들만을 애써 찾아 좇아다니는 죄의 노예로 사는 사악한 영혼들은 귀기울여 들을지라.
간증과는 약간 거리가 있지만 기왕 의문이 제기되었으니, 그에 대한 답을 여기서 간단히 적겠다. 예수님께 돌아가셔야만 했던 것은 첫째로, 오직 그 방법만이 하나님의 의를 충족시킬 뿐 아니라, 둘째로 그 방법만이 구원의 길을 완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두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은 전능하심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죽음을 막지 않았던 것이다. 좀 더 자세히 보자.
첫째, 하나님께서 당신의 의를 해치지 않으시려면 그 방법밖에는 없었다 (로마서3:25b-26). 하나님의 법은 죄인은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피조물들은 모두 하나같이 죄인이었다(3:23). 따라서 그들은 모두 죽어야만 했는데, 그를 대신해서 죽을 어린 양이 나타난 것이다. 죄없는 어린 양 예수시다. 죄가 없다는 것은 자신의 죄 때문에 죽지 않고 다른 이들의 죄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존재를 의미한다. 그 예수께서 자신이 아닌 다른 모든 죄인들을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의는 충족되었다 (3:25a). 예수님을 화목제물이라고 하는 이유다 (3:24). 이로써 모든 죄인들을 죽여야 하는 하나님의 의가 채워진 것이다 (5:10a). 이것을 성경은 예수님께서 율법의 요구를 충족하셨다(8:4) 혹은 빚을 갚으셨다고(골로새서2:14) 표현한다. 예수님이 일단 대신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유예 즉, 연기시켜 놓았다 (사도행전17:30). 즉 심판을 미루어 놓았다. 따라서 죄인들을 그들의 죄에 대해 죽어야 하는데 이것이 침례다. 침례는 예수의 죽음과 합하여, 죄에 대해 죽고 장사되는 것을 상징하기 때문이다(로마서6:3-4). 침례의 의미를 가볍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와 믿음의 회개의 필요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소치다 (마가복음16:16; 사도행전2:38).
둘째, 예수님의 죽음만이 구원의 길을 완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음은 삶의 마지막이다. 따라서, 평생을 믿음으로 살다가 죽음의 순간에 하나님을 부정하고 죄로 돌아간 자는,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 따라서 믿음으로 사는 삶은 끝까지, 즉 죽기까지 계속 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삶은 모든 피조물들의 구원의 삶의 표본이다. 그 표본인 삶은 죽는 순간까지 계속되어야만 했다. 죽음의 문턱에서라도 변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보여주어야만 했다. 그것을 보여주는 방법은 의로운 죽음을 보여주는 길밖에는 없다. 예수님께서 “죽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하셨다고 하는 빌립보서 2장5절은 크게 두개의 포인트가 있는데, 하나는 ‘죽음도 불사하고’라는 정도를 의미하고, 다른 하나는 ‘죽음까지도’를 의미한다. 이런 이유들로 예수님의 죽음은 전능하신 하나님께도 불가피한 것이었다.
[금주의 강해] 신령한 젖을 사모함이란? (베드로전서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