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호--맹목적 순종
좋은 것이라고 판단될 때 그것에 순종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만큼 큰 영적인 축복이 없는 것 같다. 무지하지만 순수한 마음에 기초한 순종은 하나님께 당분간은 기쁨을 드릴 수도 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도 어린 아이처럼 사는 사람이 정상이 아니듯이, 맹목적 순종이 언제까지나 하나님께 기쁨을 드릴 수 없음은 성경에 의해서도 분명하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성장을 통해 무지에서 벗어나 맹목적 혹은 순진한 순종에서 참된 순종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아무리 그것이 순종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구원에 합당한 믿음이 될 수 없다. 구체적으로 그 경계를 찾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따라서 결국 하나님의 판단의 몫이겠지만—이 땅에서 부활의 소망을 붙들기 위해 애쓰며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참으로 중요한 문제다. 나도 그런 어리고 어리석은 과정을 지내며 그것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교회에 정기적으로 나가기 시작하면서부터 무조건 순종했다. 무엇보다 먼저, 교회의 모든 집회에 나갔다. 월요 기도회, 구역모임, 수요 성경공부, 금요 철야기도회, 주일 예배 및 봉사 등 교회의 ‘모든’ 정기 집회에 빠지지 않았다. 내 기억에 미국에 오는 날까지 약 2년 동안 수요 성경공부를 딱 한 번 빠진 것이 전부다. 사업상 미팅, 출장, 심지어 바이어와의 미팅을 미리 만들지 않거나 심지어 불참하더라도 집회에 빠지지 않았다. 주중에 있는 수요 성경공부를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했다. 당시 내 공장이 경북 경산에 있었는데 김해 장유시에 있는 교회까지는 서너 시간이 걸렸다. 내 사업장만의 문제라면 대부분 내가 시간을 조절할 수 있었기에 문제가 안 되었지만 삼성이나 1차벤더가 관련되면 내맘대로 할 수 없었다. 그래도 밤에 회의를 하는 경우는 없으므로, 회의가 끝나고 수요집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경부고속도로를 ‘날아’다녔다. 평균 시속 170-80 어떤 때는 200킬로미터로 달리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어리석고 맹목적이었는지, 나와 내 가족의 삶을 그토록 소홀히 한 내 자신이 한심스럽게만 생각되지만, 그 때는 그렇게라도 집회에 참석하는 것이 순종이라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목숨을 건 ‘광신’이었다. 목회자가 내가 그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도 말리지 않았다. 그도 ‘광신자’였던 것이다.
다음으로 교회내 봉사에도 순종했다. 요즘도 아틀란타 한인 노인들을 돕는 일을 하는데, 이미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이유는 천지 차이다—그때는 거짓에 속아서 지금은 진리를 알기에. 창원에 사는 80대 노인 두분을 주일날 교회로 태우고 오고 가는 것부터 봉사가 시작되었다. 이사하기 까지 거의 1년 동안 단 한 주일도 내 사정 때문에 그분들이 교회를 못가거나 다른 사람의 차를 타고 교회에 오가는 일이 없었다. 죽으나 사나 그분들을 교회에 모시고 오가는 것이 내 사명이었다. 움직임이 느리고 자기 주장이 강한 노인분들이었지만 단 한 번도 그 일에 실증을 내거나 그분들이 귀찮게 여겨진 적이 없었다. 그 봉사가 기뻤고 즐거웠다. 당시에 내 업무용 차는 한국에서 출시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삼성SM7 최고급 사양이었으니 그분들도 좋아했다. 사실 그분들은 그런 차를 타볼 만한 사회 경제적 형편의 분들이 아니었다. 물론 그분들이 차의 급이 뭐냐를 따지는 분들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렇게 고급 세단을 타는 것이 나쁘지는 않았을 것이다. 통일교인들이던 한 분의 자녀가 자기 어머니를 잘 모셔줘서 고맙다며 우리 가족들에게 가끔 식사 대접을 하곤 했었다. 창원시 어딘가 유명한 개고기집도 갔던 기억이 난다.
그 차량 봉사는 주일의 시작에 불과했다. 예배가 끝나고 내가 헌물한 식재료로 교인들을 위해 우리 집사람이 준비한 식사를 마치면 나는 그분들을 집으로 모셔다 드리고 다시 교회로 갔다. 집사람이 여전히 부엌을 정리하고 있을 때 나는 전도용 교회 신문을 접었다. 미국에 와보니 신문 접는기계도 있던데, 그 큰 부자 교회에서 투자는 하지 않고 몇몇 열심인 성도들의 무료 봉사로 그 많은 신문을 접게 했다. 매주 천개 정도를 접었다. 신문 접는 일은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요즘 우리 교회의 주보를 20여 장 만들어 접을 때면 그 때 생각이 나곤 한다. 몇 달 뒤 한 두 명이 가끔 도와주기까지 처음에는 돕는 사람도 없었다. 나 혼자 꾸역꾸역 했다. 그일을 왜 해야 하는지, 그것이 나의 신앙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 등등에 대한 생각을 할 생각도 하지 않고 무조건 묵묵히 접었다. 부엌 정리를 마친 집사람은 남녀 화장실 등을 락스로 깨끗이 청소한 후에 여전히 내가 신문을 접고 있으면 와서 같이 접었다. 접은 것들을 박스에 나누어 담아 두면 이제 여성 신도들이 그 지교회 부목사의 인솔하에 주중에 배포를 한다. 그렇게 신문접기가 끝나야 주일 일과가 끝났다. 오후 4-5시.
맹목적 순종 중에, 지금 생각할 때, 가장 우스꽝스럽고 아까운 것은 헌금이었다. 나는 할 수만 있으면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보다 더 헌금을 하려 했다. 그 교회는 때론 은근히 때론 노골적으로 그렇게 가르쳤다—누가복음 6장38절을 물질적으로 해석해서 하나님께 먼저 드리면 하나님은 그 몇 배로 복을 주신다고. 그 하나님이 주신다는 복은 물질적인 축복은 물론 만사형통의 복까지 포함한 것이었다. 조용기 목사의 영적 축복, 건강 및 재물의 복을 말하는 3복론과 정확히 맥을 같이 하는 천박한 기복주의, 매머니즘 그리고 샤머니즘적 비성경적 거짓이었지만, 무지했던 나는 그들의 거짓에 빠져 들었다. 십일조는 당연히 냈다. 순소득의 10분의 1을 하니 1년에 약 2천5백만원 정도였다. 거기에 특별 선교헌금, 건축헌금, 감사헌금 등의 명목으로, 적게는 몇백만원씩 많게는 천수백만원씩을, 일년에 몇번씩 했다. 예를 들면 2005년 한해 동안 헌금이 집계된 것만 약 9천 여만원이었다. 교회에서 집계를 해서 세금공제에 쓰라고 연말에 영수증을 써주어서 알았다. 물론 헌금 영수증을 세금 공제에 쓰는 것도 불경스럽게 느껴져서 쓰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현금으로 헌금 주머니에 넣은 것도 상당히 되었을 것이다. 지갑에 있는 자기압수표 및 현금은 모두 헌금주머니에 집어넣는 게 내 룰이었다. 더구나 그 교회는 집회때마다 헌금주머니를 돌려댔었다.
나는 세계에서 두번째로 크다는 교회의 당회장 목사와 함께 식사도 하고 안양에 있는 그의 집무실에서 단둘이 커피도 마시고 환담도 나누었으며, 그는 성경책들에 자기 이름을 적어 선물로 주기도 하고 (지금도 가지고 있다), 내 사업장에 와서 축복기도도 해 주었다. 나는 목사들이 본래 다 그렇게 하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하는 헌금의 양과 분명히 관련이 있었다. 최권사라는 분을 통해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그분은 당회장 목사가 당시로부터 37년 전 창립예배를 할 때부터 그 교회의 멤버였던 분이었다. 그분은 당회장 목사와 악수 한번 하는 것이 소원이라며, 당회장 목사의 집무실에 들어가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며 환담을 했다는 내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분은 내가 헌금을 얼마나 하는지를 몰랐기 때문이었을 게다. 나중에 나 때문에 그분은 그 소원을 성취했다. 당회장 목사가 지교회에 왔을 때 나와 함께 있던 그분과 악수를 해 준 것이다.
나와 내 아내는 그렇게 맹목적으로 그 교회에 순종했다. 우리의 신앙의 열정은 뜨거웠고 마음은 순수했다. 그래서 그 순종은 순진한 순종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순종이 아니었다. 마치 사도 바울이 유대인들에 대해 한탄하여 말하였듯이 우리의 그 “열정은 … 지식에 기초한 것이 아닌” 것이었다 (로마서 10:2). 그런 무지하고 순진한 열정은 처음에는 순수함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그러나, 오랫동안은 아니다. 왜냐하면 참된 열정은 하나님의 지식을 구하기 때문이다 (에베소서 1:17). 만일 어떤 사람이 언제까지나 무지하고 순진한 열정으로 순종을 하되 맹목적으로 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순수한 열정이 아니라 죄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것에 불과하다 (디모데후서 3:6-7). 결국 무지는 오래 가는 익스큐즈가 아니다 (베드로전서 1:14). 참된 믿음인 참된 순종은 결국 ‘진리’에 대한 순종이다. 이것은 어느 교회나 목사가 가르치는 것에의 순종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진리에 대한 순종이다 (베드로전서 1:22). 무지로 인해 목숨을 건 맹목적 순종은 결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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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호--하나님의 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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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호--방탄 유리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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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호--시련 속에서 피는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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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호--철저한 순종의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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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호--풍이 떠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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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호--분별된 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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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호--영혼까지 탈탈 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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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호--맹목적 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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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호--믿음은 하나님의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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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호--예수님은 왜 돌아가셔야만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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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호--순종과 기도의 응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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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호--덕유산 해돋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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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호--여정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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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호--하나님의 신비로운 인도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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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호--풍이 오다: 하나님의 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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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호--첫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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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호--믿음의 시작: 첫설교를 듣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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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호--기다림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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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호--여호와 이레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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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호--여호와 이레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