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호--영혼까지 탈탈 털리다
참된 신앙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정말 쉽지 않은 현실이다. 교회에 나가면 교회에서 목사님 혹은 전도사님 혹은 믿음의 선배들로부터 그것을 배울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만, 불행하게도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현실이다. 오히려 반대로, 그나마 있던 진리의 신앙을 찾고자 하는 그 순수한 마음마저도 도둑질 맞아 버리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현실을 염두에 두고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소중한 것을 돼지에게 주지 말라고 경고하셨지만(마태복음7:6), 맘먹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기를 치려는 자들이 많은 이 세상에서 그들에게 속지 않기는 쉽지 않다. 나도 그렇게 처음 다닌 그 교회에서, 지난 주에 말했듯이 돈 뿐 아니라, 영혼까지도 탈탈 털렸다. 어리석게도 그때는 그걸 몰랐지만.
심리학에서 선택적 인지(selective perception, 내번역)라는 용어가 있다. 사람은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듣고 싶은 것을 듣고, 기억하고 싶은 것을 기억한다는 말이다. 어떤 사람이 무언가를 원하면 자신이 들은 말, 본 것, 혹은 기억이 마치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해주는 것처럼 해석을 하는 경향이 있다. 한국의 순복음 교회 같이 오순절파 교회들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기적과 표적을 구한다. 방언을 “받는” 것을 믿음의 척도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다. 한국에서 내가 다닌 교회가 그런 경향이 매우 강한 오순절파 교회였기 때문에 나도 그런 것을 애써 구했다. 그런걸 애써 구하는 나의 눈에는 별게 다 표적으로 보였었다.
방언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아내는 우리가 방언을 받지 못하는 것때문에 약간 실망도 한 것같았다. 나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일단 방언이라고 사람들이 하는 소리가 아름답지 않았다. 귀신들이 와글와글하는 소리같기도 하고, 어릴 적 타잔 드라마에서 보던 정글 속에 고립되어 사는 부족들이 미신적 행위를 할 때 집단적으로 질러대는 주술적인 소리같기도 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방언에 심드렁했던 이유는 방언하는 사람들 중에 제대로 의를 행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방언을 한다면서 우쭐해 하던 그들에게서 성숙한 인격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오히려 이중적인 면이 많았다. 어쨌든, 그때는 성경적으로 그것이 옳은지는 스스로 판단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이상하게 생각은 했지만 그저 그렇거니 하고 넘어갔다.
방언 이외에 다른 것들은 나도 비슷했다. 얘를 들면, 당시에 우리가 살던 아파트 주면에 작은 숲이 있어서 아침마다 새울음 소리가 드렸는데, 나는 그 새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혹시 그 새소리를 통해서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계시가 있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내가 신앙을 갖기 전에도 새는 똑같이 울었으련만, 어리석은 나는 그 새소리에서 무엇인가 하나님의 계시를 찾으려고 한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다보니, 그날 어떤 일이 생기면 아침에 들었던 새소리와 애써서 연관을 지으려고 했다. ‘아침에 까치 소리가 경쾌하게 들리더니 오늘 좋은 일이 생겼구나’ 라든가 ‘아침에 기러기가 날아가는 모습이 어떠어떠하더니 오늘 이런 일이 생기려고 그랬구나’ 라는 식이었다. 꿈에도 엄청나게 관심을 기울였다.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무슨 꿈을 꾸었나 그리고 그게 무슨 뜻인가를 곰곰히 생각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었다. 뿐만아니었다. 구름의 모양을 관찰하기도 했다. 혹시 구름이 무엇을 전하려하는 것은 없는가를 늘 지켜 보았다. 돼지 눈에는 먹을 것만 보인다고 그런 것을 열심히 찾던 내게는 모든 것이 표적으로 느껴졌다.
그런 어리석은 신비주의적 무속적 미신적 경향 때문에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당시에 나는 새로운 사업거리를 찾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 모임에서 당회장 목사의 강해를 듣는데 디자인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얘기를 한 예화로 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계시라고 받아들였다. 삼성2차벤더를 하면서 디자인 사업 눈에 들어왔었다. 핸드폰 등 전자제품의 외관을 디자인하는 것은 별도의 디자인 회사의 몫이었는데 수익성이 좋은 회사들이었다. 평소에 그에 관심을 가졌었는데, 그날 저녁에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것이다. 그날부터 어떻게 하면 디자인 사업을 할 수 있을까 골몰했다. 전에 알던 대학동문 화가 친구에게 연락을 했다. 그 친구가 선뜻 달려들었다. 배고픈 무명 화가가 사업가 친구가 만나자는데 마다할 리가 없어서였는데 그것도 하나님의 역사라고 아전인수로 해석했다. 그 친구가 디자인 사업을 하려면 먼저 디자인 입시학원을 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을 했다. 자본규모 등으로 볼 때 좋은 생각이었다. 한국에서 내노라하는 투자회사 사장인 지인은 이미 학원사업의 사업적 가능성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말렸다. 오히려 국밥집 프랜차이즈 같은 수익성을 위주로 한 프랜차이즈 사업에 투자를 하라고 권했다. 속으로 웃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 역시 생각하는 것도 수준이 그렇군’ 하고 그의 충고를 무시했다. 프랜차이즈를 분당에 허가해 주겠다는 대형 미술학원이 금방 나타났다. 2억 정도를 투자해서 학원을 오픈했다. 불과 말이 나온 지 두어 달 만이었다. 그리고 개원 후 6개월 동안 운영자금으로 1억 정도가 들어갔다. 6개월 동안 학생은 고작 30명이 채 미치지 못했다. 결국 전세금 이외에는 더 이상 투자할 여력이 없게 되었을 때에서야 깨달았다, 내가 미쳤었다는 것을. 그래서 3억의 투자 중에 건물 보증금 1억과 권리금 2천만원을 받고 학원을 팔았다. 프랜차이즈를 쉽게 내주었던 본원의 원장이 인수를 했다. 그는 자기돈 2천만원을 들여서 분당에 대형 미술학원 하나를 연 셈이었다.
지금도 기억난다. 학원자리를 찾으러 다닐 때 얼마나 하늘을 쳐다보며 구름이 나를 어디로 인도하는가를 보려고 했던 정말 미치광이 같던 그때가 … 그리고 그 구름의 모양들과 우연들로 인해서 9개월 만에 1억8천을 날리고, 사기꾼같은 본원 원장에게 2천만원에 그걸 넘길 수밖에 없었던 그 무지몽매하던 때가. 돈도 문제지만 그 어리석음은 생각만해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런 신비주의에 빠져있던 내가 목사의 말은 물론 일거수일투족에 얼마나 미쳐있었겠는가? 부끄러워서 생각도 하기 싫지만 사실이었다. 내 눈에 그 목사가 때로는 예수님같이 때로는 하나님의 천사같이 보였다. 그는 신앙을 가르치면서, 자신의 교회 건물들을 가득채운 나와 같은 광신자들에게, 은근히 기술적으로 그리고 교묘하게 성경을 이용하여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메세지들을 던졌다. “십일조를 해서 천국보화를 받으라” “하나님께 먼저 드리라 그리하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등등 성경 말씀들을 세상적이고 물질적인 문맥 속에서 전략적으로 사용함으로써 나와 같은 광신도들의 주머니는 물론 영혼까지 탈탈 털어냈다.
정말 사악한 일이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서 내 주심으로 그를 믿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상급이, 고작 이 세상에서의 약간의 성공과 물질적 풍요 혹은 건강에 불과하겠는가? 어디 성경이 하나님을 믿으면 반드시 성공하고, 물질적으로 풍요로와지고 건강해진다고 했는가? 아니 신약성경 어디에 그런 것을 하나님이 예비하신 축복이라고 한 곳이 단 한곳이라도 있는가? 성경 어디에 하나님께서 복음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직접 말씀하시고, 나타나시고, 표적을 보여주신다고 하셨는가? 도대체 성경 어디에 무당이 그녀를 찾아온 고객에게 점괘를 주듯이 하나님께서 목사를 통해서 그 사람에게 계시를 주시겠다고 했는가? 어디에도 그런 것은 없다. 사도들의 시대에는 필요에 따라서 계시가 있을 수밖에 없었지만, 이미 계시는 사도들에게 이루어진 것으로 필요충분하게 이루어졌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말이다. 그래서 성경 외에 다른 것을 더하거나 성경에 있는 것을 빼면 안된다는 경고를 주신 것이다 (요한계시록22:18-19) . 나아가서, 그렇기 때문에, 이 성경이 가르치는 복음 이외의 것을 가르치면 저주를 받으리라는 저주를 기록해 놓은 것이다 (갈라디아서1:8-9).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신비주의적 신앙에 빠져 있다. 그리고 거짓 선생들은 자신들의 인기와 자신들의 교회비즈니스의 수적성장이라는 사리사욕을 위해서 그들을 이용한다. 어리석은 광적 신도들은 그들의 노예가 되어 자신이 가진 것을, 하나님께가 아니라, 그들에게 털리고, 나아가서 영혼까지도 털린다.
하나님의 말씀은 신비주의적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계시한 대로만 이루어진다. 만일 하나님의 역사가 하나님의 말씀하신 것 외의 신비주의자들이 기대하는 대로 일어난다면 이 세상은 무질서해질 것이다. 만일 이 우주를 운행하시는 하나님께서 무질서한 분이셨다면, 이 우주는 그 안에 것들이 서로서로 부딛히고 충돌해서 이미 오래 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나아가서,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어떤 것이든 이 세상의 것으로 사람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 아니시다. 영적으로 잘 되면 범사가 잘 되는 것은 마치 부수입과 같은 것이지 그것을 주된 목적으로 두신 적이 없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물질적으로 육체적으로 잘 되게 된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천국에 가는 것은 아니니 그것을 얻었다고 만족할 일도 아니다. 신비주의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아니다. 귀신들린 무당의 우상숭배에 불과하다. 우상숭배자들이 자신들이 좇는 귀신을 ‘하나님’이라고 망령되이 부르는 것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