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은 믿음의 다른 말과 같다. 따라서 순종은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고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제사보다, 즉 신약의 개념으로 보면, 예배행위 보다 더 기뻐하신다 (사무엘상15:22; 마태복음5:23이하). 그렇다면 순종은 무엇에 순종하는 것인가? 무엇에 순종하는가에 따라서 그 사람의 신앙이 구원의 참된 신앙이 될 수도 광신이 될 수도 심지어 아무것도 아닌 우상 혹은 귀신 숭배가 될 수도 있다. 내가 처음 순종이라고 한 것도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성숙하지 못한 유아적인 것이었다.
크리스챤이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은 교회에 가고 성경을 읽기 시작하자 마자 배웠다. 사실은 중학교 도덕 시간에 종교에 대해서 배울 때 이미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라고 배웠다—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그에 순종했다. 맹목적으로 … 어리석었지만 잊지 못할 교훈을 남기면서.
어느 주일 오후 늦게 거의 봉사를 마칠 즈음에 교회로 어떤 젊은이가 찾아왔다. 교회 목사에게 자신의 사정을 말하면서 도움을 청했다. 요지는 자기가 포크래인 기사인데 핸드폰비를 몇 달 째 내지 못해서 전화가 끊어지는 바람에 전화연락을 받을 수 없어 일거리를 잡지 못해 벌써 두어 달 동안 먹을 것도 없이 어렵게 지내고 있다고 했다. 나는 그가 목사에게 하는 얘기를 옆에서 들었다. 목사는 그를 도와줄 방법이 없었다. 그도 매우 가난하게 사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교회 재정으로도 그가 마음대로 도와줄 수가 없었던 것같다. 헌금이 걷히면 당회장 목사의 사람이라고 공공연하게 얘기되던 여자 전도사가 곧바로 당회장 목사에게 송금을 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 젊은이는 도움을 받지 못하고 쓸쓸히 돌아서 교회를 나가고 있었다. 나는 그의 사정이 딱했다. 그래서 내가라도 도와 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차에 태워서 가까운 핸드폰 대리점으로 가서 80여 만원의 밀린 핸드폰비를 내 주었다. 여간 고마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먹을 것도 사먹으라고 현금도 좀 주었다. 연신 고개를 숙이며 감사하다, 은혜를 갚겠다, 또 교회에 잘 나가겠다는 등의 말을 하며 헤어졌다. 그런데 몇 일 후에 연락이 왔다. 자기가 지병이 있어서 병원에 가야 하는데 병원비가 없어서 못간다는 딱한 사정을 말하면서 돈을 좀 달라고 했다. 그래서, 그럼 차도 없으니 내가 병원에 데리고 가 주겠다고 했다. 미안하다고 극구 사양하면서 자기 혼자 가도 되니 돈만 달라고 했다. 나는 병원에 태워 주겠다고 하고 차에 태웠다. 어느 병원이냐고 했더니 머뭇머뭇하더니 창원에서 가장 큰 병원 이름을 댔다. 그리로 데리고 갔다. 그런데, 그 때는 나도 병원에 가본 일이 거의 없어서 잘 몰랐지만, 어디서 어떻게 해야 하는 줄을 몰랐다. 결국 어이없게도 그가 들어간 곳은 응급실이었다.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감을 잡고 있었지만 그때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담당 의사 이름이 뭐냐고 물었다. 알 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그에게 말했다. 그 동안 도와 준 돈은 예수님께서 주셨다고 생각하고 앞으로는 거짓말하지 말고 성실하게 살라고. 그리고 그 뒤로 한두 번 그에게서 더 연락이 왔지만 받지 않았다. 그 일이 있은 후에 지성전의 목사가 그와 관련해서 내게 말했다, 집사님이 마음이 너무 선하셔서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거라고.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가르쳐주지는 않았다. 아니 못했다고 말하는 게 옳을 게다.
선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사람의 당연한 일이다. 선을 행하라는 말은 악이 없는 삶을 살라는 포괄적인 의미이다. 즉 삶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에 관한 말이다.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며 사는 사람이 가져야 할 정신이 직역하면 ‘거룩한 정신’ 이란 말인 성령이다. 물론 그 거룩한 정신은 인간의 기준에 따라 거룩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거룩한 것이고 그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즉 복음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형성되고 그 사람의 삶 속에 살아있는 정신이 바로 성경이 가르치는 “거룩한 정신” 즉 성령이다.
크리스챤의 거룩한 정신이 가르치고 인도하는 선한 삶에서는 당연히 어려운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돕고 함께 하는 것이 포함된다. 하나님은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시고 자비를 원하신다는 말이 그것을 원칙적으로 표현한다 (마태복음9:13). 자비 즉 사랑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다. 그러면 무조건 사람들을 돕고 베풀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선이고 사랑인가? 여기서 분명히 할 것은, 예수님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마리아인도 그런 선한 행위를 했기 때문에 구원을 얻었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 비유의 포인트는, 믿음이 있다고 생각했던 제사장과 레위인도 사랑을 행하지 않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믿음에 기초한 선행,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함으로써 행하는 선행, 이것이 바로 거룩한 정신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시는 선행이고 참된 순종이다—믿음에 기초한 순종.
믿음에 기초한 순종이란, 하나님의 말씀 즉, 복음에 대한 순종을 말한다. 즉, 순종이라고 해서 맹목적으로 베푸는 것이나 이방인이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에 따라 행하는 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들면, 이란혁명 과정에서 이슬람 종교지도자들이 이란 백성들을 위해서 분신자살을 많이 했는데, 그런 것을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구원의 사랑이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희생은 혁명이라는 세상적 정치적 목적을 위한 것이지 복음에 순종하여 자신과 타인들의 영원한 구원을 위해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셨지만 만일 그것이 알라신을 위한 것이었다면, 그 십자가의 죽음이 그를 그리스도가 되게 했겠는가? 이와 같이, 참된 순종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서 구원의 복음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참된 순종은 맹복적이 아니라 분별력을 통해 이루어진다. 예를들자면, 고등학생 대학생 등 한참 혈기가 왕성하고 패기가 넘치며 순수한 마음을 가진 젊은이들을 전쟁 중인 중동지역으로 선교를 데리고 가서 비극이 생긴 일이 있었다. 그 젊은이들이 복음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선교를 갔으니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그것은 자살행위이고, 그 젊은이들이 더 말씀과 삶으로 훈련받고 성숙하여져서 만들어낼 수 있는 가능성의 어린 싹을 잘라버린 무지막지한 악행과 다름없다. 성경에 나오는 다니엘과 그 친구들의 얘기를 들먹이며 청소년들에게 원숙한 교인들에게도 힘든 일을 시키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순진한 열정과 패기를 세속적인 어른들의 욕망 혹은 교회비즈니스에 악용하는 것에 불과하다. 다니엘과 그 친구들은 전쟁포로로서 스스로 자신의 삶을 결정할 수 없는 강제적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섬긴 얘이지, 스스로 성숙되기도 전에 젊은 패기와 열정만으로 자신들을 사지에 스스로 집어던진 어리석은 자들의 얘기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그런 것은 순종도 아무것도 아니고 쇼맨쉽 혹은 어리석음에 불과하다. 물론 어린 나이지만 다니엘처럼 성숙하고 분별력이 있다면 얘기는 다를 수 있겠지만—참고로, 다니엘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미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했다 (다니엘1:17).
순종도 분별해서 해야 한다. 술을 사먹을 줄 알면서도 적선을 한답시고 돈을 주어서는 안된다. 한시간이 걸리더라도 배가 고프다면 음식을 사다 주는 것이 참으로 그를 돕는 길이 될 것이다. 크리스챤들의 선한 마음을 남용하려는 자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크리스챤들도 복음에 순종하는 삶을 살며 선을 행하고 베풀 때, 그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어리석게 속고 이용당하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사람의 실질적 필요를 위해서, 그리고 진정으로 그 사람을 위하는 마음으로 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집의 선한 청지기같이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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