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에 믿음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성경이라는 것은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안다. 그런데, 믿는다고 말만 하는 그런 믿음이 구원을 주는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잘 모르는 사람이 적지 않은 것 같다. 야고보서 2장14절은 말하기를,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고 함으로써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없는 믿음이 있음을 강조한다. 야고보는 이런 믿음을 죽은 믿음이라고 하고, 이어 이런 류의 믿음은 구원받을 수 없는 저주받은 존재들인 귀신들의 믿음과 같다고 한다. 오직 살아있는 믿음만이 그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야고보서는 그 믿음이 삶의 행위로써 나타나고 증거되는 믿음이 살아있는 믿음이라고 가르친다.
순종하는 믿음
이렇게 믿음이 살아서 그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그 사람의 삶에 나타나도록 하는 마음자세를 순종이라고 한다. 따라서, 살아있는 믿음과 죽은 믿음을 가르는 기준은 순종이다. 성경 로마서 1장5절과 16장26절에 따르면, 사도 바울의 전도사역의 목적은 이 순종하는 믿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것이었다. 이로써 볼 때,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은 단지 말로만의 고백이나 머릿속 생각만으로가 아니라 순종으로 뒷바침 되어야 한다. 이것이 상식과도 일치하는 생각이다. 말로만 믿는다고 하고 그 믿는 바가 삶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을 위선이라고 하고, 그렇게 사는 사람을 이중인격자라고 비난하는 것이 상식이다. 이는 마치, 어떤 자식이 말로는 부모를 존경한다고 하면서도 전혀 부모의 뜻에는 따르지 않는 것과 같은데, 이런 자식을 두고 훌륭하다고 하는 상식은 없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고서는 구원이 없다. 신약의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뜻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하는데,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부활을 통한 영원한 구원에 소망을 두고 이 세상에서는 예수님의 본을 따라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 그 핵심이다. 한마디로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가장 큰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 다음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고, 갈라디아서 5장14절도 모든 성경을 통털어 한마디로 요약하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라고 한 것 등을 보면 분명하다. 결국 순종하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에게서는, 그 삶의 전체를 통해, 사랑이 나타난다. 그 사랑을 보고 그 사람이 순종하는 믿음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사랑은 순종하는 믿음의 증거다. 사랑이 크리스챤의 삶의 핵심임을 가르쳐 갈라디아서 5장8절은 말하기를, “할례나 무할례나 아무런 효력이 없되 오직 믿음으로 역사하는 사랑뿐이니라” 라고 한다.
사랑과 순종
순종이 없는 사람에게는 사랑도 없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고 원하시는 사랑은 그저 말로만 하는 사랑이 아니라, 요한일서 3장18절이 말하듯이, 진실로 진정으로 하는 사랑을 말한다. 로마서 12장9절이 말하듯이, 진정하지 않은 것은 사랑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사랑은 말과 혀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희생을 감수하는 사랑이다. 바로 이점이 크리스챤의 사랑과 세상적 사랑의 차이점이고, 바로 이점 때문에 크리스챤의 사랑이 어렵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에 따르면 예수님이 말하는 사랑은 왼뺨을 맞으면 오른 뺨을 돌려 대주고, 물건을 1마일 들어다 달라고 하면 2마일을 들어다 주고, 겉옷을 달라하면 속옥까지 벗어주며, 원수까지도 미워하지 않고 오히려 사랑하고, 심지어 자신을 핍박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한다. 이렇듯 희생적인 크리스챤의 사랑은 하나님을 믿고 이 세상이 아닌 영원한 생명에 소망을 둔 사람들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다. 그런데, 이 사랑이 하나님의 뜻이니 어찌하겠는가. 그러니 그 사랑을 갖고 나타내는 것이 복음에 순종하는 것이다. 이 어려운 크리스챤의 사랑을 하게 하는 것이 바로 순종이다. 순종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의 삶에, 그 믿음과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으로 확연히 나타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그래서 크리스챤의 사랑을, 갈라디아서 5장22절은,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의 열매라고 한다. 희생적인 크리스챤의 사랑은 사람의 의지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가신 사랑의 길이 모질고 모진 가시밭길이었기에, 그 뒤를 좇는 자들의 삶도 가시밭길이 아닐 수 없다. 마태복음 6장13절에서 주님께서, 구원에 이르는 문은 좁고 그 길이 협착하여 그리로 가는 사람이 많지 않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를 두고 한 말이다. 그 사랑은 오직 순종을 통해서 나타나고, 오직 순종을 통해 나타나는 사랑만이 진정한 사랑이다.
순종은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다. 세상적인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맡기면 된다.
순종이란 무엇인가?
순종을 부담스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부담은 순종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자신의 의지와 힘으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해 내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순종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고, 심지어 불가능하게 느껴진다. 서양의 대다수 신학자들이 앞서 말한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이 명하신 사랑이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리는 이유다. 먼저 인정해야 할 것은, 역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도록 사람은 순종하면 된다는 것이다. 순종이 무엇이길래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가? 순종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데 좋은 비유가 있다. 바로 물결이 거센 강에 떠있는 배의 비유다. 강물의 흐름에 거슬려 목적지를 잡으면 어찌 되겠는가? 목적지로 나가기 위해 아무리 노를 저어 본들, 힘만 들고 끝내는 목적지에 닿지 못하고 제자리걸음만 하거나 오히려 더 멀어질 것이다. 강물이 흘러 이르는 곳에 목적지를 정하면 어찌 될까? 가만히 있어도 배는 강물을 따라 흘러 언젠가는 목적지에 다다른다. 가다가 얕은 곳을 만나 멈추더라도 기다리면 된다. 비가와서 물이 차 오르면 배는 수면으로 다시 떠올라서 결국 나아간다. 약간 방향이 삐둘어져도 그리 놀랄 것 없다. 이쪽 저쪽 강둑에 부딛히기도 하겠지만 노를 이용해 다시 강 중심으로 돌아오면 여전히 배는 흘러 내려간다. 물론, 너무 강하게 부딛힌다면 파선할 위험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강물의 흐름에 순행하여 흘러 내려가는 배에서, 그 방향에 맞추어 노까지 저으면 어찌 되겠는가? 더욱 빨리 목적지에 이른다.
강물의 비유
강물의 흐르는 방향은 하나님의 뜻이다. 배는 나 자신이고 노를 젖는 것은 나의 판단에 따른 나 자신의 노력이다. 강물이 흐르는 힘은 사람이 어찌 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이고 역사다. 순종은 무엇인가? 바로 항해의 목적지를 강물이 흘러 이르는 곳에 정하는 것 즉, 항해를 강물의 흐름에 맞게 하는 것이 순종이다. 다시 말하면 내 인생의 목적을 하나님의 뜻과 일치시키는 것이다. 노를 젖는 것이 순종이 아니다. 목적지를 상류에 정하고 강물의 흐름을 거슬러 노를 젖는 것은 순종이 아니라 오히려 강한 거역이다. 상류를 향해 목적지를 정한 사람은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것으로, 하나님이 정하신 목적지에 결코 도달할 수 없다. 노를 열심히 저의면 저을 수록 더 안 된다. 강물과 같은 방향으로 목적지를 정한 사람만이 목적지에 이를 수 있다. 삐딱하게 배를 대어 양 둑에 배를 부딛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따르기도 하지만 자신의 생각이 여전히 살아 있는 사람인데, 파선의 위험을 갖고 사는 사람이다. 노는 배가 삐뚤어지지 않도록 방향을 조종하거나 어디에 걸려 나가지 못할 때 바닥을 밀어 깊은 물로 배를 움직일 때 쓰는데, 자신의 지혜와 노력을 의미한다. 물론, 강물의 방향에 맞추어 힘을 더해 노를 저으면 배는 더 빨리 전진하겠지만,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 배를 움직이는 것은 강물이지, 그 사람이 젖는 노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라
순종은 어떤 구체적 행위가 아니라 그 사람의 하나님의 뜻에 대한 마음의 태도다. 순종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므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을 산다. 예를 들면, 서로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은, 자신의 세상적 욕심을 죽이고, 예수님께서 본을 보여주신 그 사랑을 나타낸다. 그 사람의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이다. 강물에 몸을 맡긴 배가 유유히 흐르는 강물의 거센 힘에 몸을 맡겨 목적지로 흘러 가는 것과 같다. 겉보기로는 하나님의 뜻에 맞는 행위를 한다고 하더라도, 순종하는 마음이 없으면, 그 행위만으로는 순종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이 아닌 그런 행위로는, 하나님이 정하신 목적지인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상류를 향해 목적지를 정하고 열심히 노를 젖는 것이 이런 경우다. 어떤 사람은 순종이 중요하다는 생각만 갖고 있으면 되고,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아도 된다고 할 수 있는데, 생각만으로 하는 것은 거짓 순종이다. 믿음과 같이 순종도 삶으로써 증거되어야 한다. 삶에 나타나는 성령의 열매가, 보이지 않는 순종의 증거다. 말로만 예 예 하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자식을 순종적이라고 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이들은 생각으로만 항해를 할 뿐, 배를 아예 강물에 띄우지 않거나, 배를 묶은 줄을 풀지 않거나, 강바닥에 박힌 닻을 끌어올리지 않는 자들과 같다. 참된 순종은 그 삶을 통해 반드시 하나님의 역사 즉 사랑이 나타남으로써 증거된다. 거꾸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그 뜻을 이루시도록 자신의 삶을 온전히 맡기는 것이 순종이기 때문이다.
순종하는 믿음이란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에 대해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 말이나 생각으로만 믿는다고 하는 사람에게는 성령의 열매 즉 사랑이 나타나지 않는다. 순종이 없는 죽음 믿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 뜻을 이루시도록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수 없다. 수확기가 지나고 열매를 맺지 못한 나뭇가지들을 잘라 불소시개로 쓰는 농부와 같이, 이 삶이 끝난 후 주님의 날에 열매를 맺지 않은 나뭇가지들은 잘리워 불못에 던져질 것이다. 순종없는 믿음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 구원에 없어서는 안 되는 이토록 중요한 순종은, 그러나,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다. 세상적인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향해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맡기면 된다. 그런 마음의 자세가 바로 순종이다. 자신이 스스로 할 수 없는 어려운 사랑일지라도, 하나님을 믿고 맡기면 그 안에 사시는 하나님께서 이루시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