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왕이 있었다. 왕은 어느 날 자신에게 빚진 자들을 불러 회계를 했다. 그 중에 은괴 1만개를 빚진 신하가 있었는데 그는 그 빚을 갚을 능력이 없었다. 그의 온 가족이 노예가 될 판이었다. 그는 왕 앞에 엎드려 신간을 더 주기를 눈물로 간구했다. 왕은 그의 사정과 간구를 받아들여 그의 빚을 모두 탕감해 주었다. 그 왕의 하해와 같은 은혜를 연신 감사하며 찬양하며 궁을 나오다가 그에게 백일 품삯을 빚진 이웃을 만났다. 그는 그 이웃의 멱살을 잡으며 당장 빚을 갚으라고 독촉했다. 그 이웃은 자신의 딱한 사정을 말하며 말미를 주기를 간청했지만, 그 신하는 막무가내였다. 자비를 베풀기는 커녕 오히려 그 이웃을 저자거리에서 창피를 주었다. 이 일이 왕의 귀에 들어갔다. 왕은 그 신하를 다시 불러들여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너에게 빚진 자를 불쌍히 여겼어야 마땅치 아니하냐?” 왕은 크게 노하여 본래의 빚을 다 갚도록 옥졸들에게 그를 붙였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모든 하나님의 계명은 이 한 계명으로 완성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최후의 만찬에서 그 제자들에게 마치 오직 한 계명만 지키면 다른 모든 계명들이 지켜지는 것처럼 말씀하셨는데,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그저 “평안하시죠?” 혹은 “사랑합니다”와 같이 가볍게 말과 혀로만 하는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웃이나 형제를 위해 목숨까지도 내려놓을 수 있는 점점 커져 나가야 할 진정한 사랑을 말합니다. 아니, 아무 것도 빚진 것도 없고, 아무 것도 바라는 것도 없는 이웃이나 형제를 왜 그렇게 사랑해야 한다는 것일까요? 나와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는 사람들을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이웃이나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서 구원에 무슨 문제라도 생기는 것일까요? 위의 성경 마태복음 18장 23-34절에 소개된 일화를 통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내리사랑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웃과 형제를 사랑하라고 하신 것은 아무런 이유가 없는 밑도 끝도 없는 게 아닙니다. 또 그것이 세상을 살만하게 또는 아름답게 만들 것이기에 기왕이면 좋은 게 좋은 거니까 그러면 좋겠다고 시키시는 것도 아닙니다. 거기에는 분명한 근거가 있고 그러실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은괴 만 개 빚진 신하의 빚을 탕감해 준 왕과 같고, 우리는 그 빚을 탕감 받은 신하와 같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빚을 졌었을까요? 사실 우리가 진 빚은 은괴 만 개 보다 더 컸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목숨입니다. 본래 우리는 죄로 인해 영원히 죽어야 할 운명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진 빚은 바로 우리의 죄값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스스로 그 죄값을 치를 수가 없어 지옥에 갇혀 영원한 형벌을 받을 운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눈물로 호소하자 하나님은 우리의 죄값을 탕감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죄값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대신 받으시고 우리는 그 죄값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은 이처럼 우리 스스로 갚을 수 없는 죄값을 없애주는 어마어마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에게 조그만 잘못만 한 사람도 용서하지 못합니다. 아니 우리에게 잘못한 것이 없어도 우리는 우리에게 득이 되지 않는 사람에게는 사랑은 커녕 친절도 베풀지 않습니다. 거꾸로, 혹시라도 내게 무슨 해라도 끼칠까봐 경계하고 멀치감치 거리를 두고 흘깃흘깃 살피며 뭐 흠잡을 게 없나 하는 생각이나 하기 일쑤입니다. 이런 우리는 마치 궁을 나가자마자 이웃의 목을 조르며 빚독촉을 하는 신하와 같습니다. 왕으로부터 탕감받은 빚에 비하면 우리에게 진 이웃의 빚은 천분의 일 만분의 일도 안 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에 비하면 우리가 우리 이웃을, 애써 사랑한다 한들, 천분의 일 만분의 일도 안 되는 것인데도, 그것조차도 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이웃을 그리고 형제를 사랑해야 하는 이보다 더 확실한 이유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고 믿는다면 그는 그의 이웃과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왕이 말했듯이,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우리의 죄값을 탕감해 준 것 같이 우리도 우리의 이웃과 형제를 사랑하고 나아가 마음의 빚이 있어도 탕감해 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웃과 형제를 사랑하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사랑을 본받아 그들에게 행하라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면
예수님의 피를 통해서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지만, 모든 사람이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그 끝없는 사랑을, 입으로 ‘말하고’ 머리로 ‘아는’ 사람은 많지만, 진정 마음으로 깨닫고 구체적으로 자신을 위한 것으로 느끼고 감격하고 감동된 사람은 결코 흔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보고 이것을 알 수 있을까요? 그 이웃과 형제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는가를 보면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진정으로 깨닫고 받아들인 사람들은 그 사랑을 나누지 않고는 가만 있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하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고 말하면서도 이웃과 형제를 진정 사랑하지 않으면, 따라서, 그 사람의 마음은 착각이거나 말뿐인 것에 불과합니다. 작은 잔에 한 수대의 물을 부으면 물이 넘쳐 흘러 주변까지 적시듯이, 하나님의 사랑은 어마어마하게 크기 때문에 제대로 받으면 반드시 흘러 넘쳐서 반드시 주변을 흔건하게 적시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고 말하며 “주여 주여” 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지도 않고, 행하지도 않고, 나아가 그 향기를 풍기지도 않는 사람은 거짓말 장이라고 성경이 분명히 말합니다 (요한일서 4:2).
이런 사람은 마치 은괴 만 개의 빚을 탕감받은 신하와 같습니다. 자신이 탕감받은 빚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 자신은 물론 그 처자식까지 노예로 팔려가게 할 뻔한 크고 심각한 빚을 아무런 대가없이 탕감해 주었는데도 그는 그것을 마음으로 깨닫지도 못하고 실감하지도 못했습니다. 왕의 은혜로 정말 하늘을 날아 오를 것같은 자유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기뻐하고 감사하기는 커녕, 자신에게 고작 백일치 품삯을 빚진 친구의 목을 조르는 악행으로 곧바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아무리 사랑을 주어도 그것이 사랑인지 조차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무리 도움을 주어도 그 도움을 받으면서도 주는 사람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의 모양은 하고 있지만 짐승의 마음을 갖고 사는 불쌍한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위해 그 독생자를 십자가의 죽음으로 내주는 사랑을 보여 주었어도, 그것을 입으로는 말하고 머리로는 알지언정, 진정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하고 온 마음으로 느끼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에게 아무런 득을 줄 것이 없는 이웃이나 형제를 사랑하지 못합니다. 사랑은 커녕 진정한 관심을 보이지도 친절을 베풀지도 못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예배를 드린다고 한들, 하나님께서 받으실리는 만무합니다 (마태복음 5:23-24참조).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의 구원?
무서운 것은, 이웃의 빚을 탕감해 주지 않는 신하는, 본래 탕감받은 줄 알았던 그 빚을 다시 갚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번 탕감받았으니 그 이후에 다시 번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는 이기적인 마음에 갖는 순진하고 바보같은 망상입니다. 왕은 인격을 가지고 진정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도 이웃과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한번 사랑과 은혜를 주었었더라도, 다시 불러들여 그 죄값을 모두 치르게 하십니다. 따라서, 이웃과 형제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이 그 사람에게 아직도 유효하다는 증거입니다. 이웃과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은 취소됩니다. 참으로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우상이 아니고 인격을 가진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로는 감사하다고 찬양하고 뒤로 물러가서는 금방 이웃의 목을 조르는 그 신하와 같은 자들에게 그 죄값을 치르게 하지 않을 하나님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웃과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도 취소됩니다.
이웃과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그저 좋은 게 좋은 거니까 하라는 것도 아니고, 까다로운 신이 사람을 괴롭히기 위해 무턱대고 내리는 명령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이라면 당연히 자연스럽게 하는 것이기에, 결국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받고 느끼고 감격하고 감사하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형제와 이웃에 대한 사랑은 구원의 증거이고 구원의 보증입니다. 구원을 원하십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신 것과 같이 당신의 이웃과 형제를 사랑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