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중에 가장 불행한 것은 여인들과 아이들입니다. 남자들은 전선에 나가고 여인들이 고향에 남아 생계를 이어야 할 뿐 아니라, 전쟁에 필요한 후방 지원 물자를 생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천진난만하게 집에서 사랑받으며 학교에서 교육을 받아야 할 아이들도 아버지와 삼촌들은 전쟁터에 엄마와 이모 고모 심지어 누나는 산업전선에 빼앗긴 채 배고품과 외로움을 견디어야 합니다. 배고픔과 외로움 보다 더 슬프고 고통스러운 것은 파괴된 가정들의 비참한 현실입니다. 전선에서 아버지를 잃은 아이들도 그렇지만,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고 심지어 다른 아이들과 피부색깔이 다른 아이들의 삶은 더욱 그렇습니다. 그들은 배고픔과 외로움 외에 천대와 멸시까지도 견뎌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미도 그런 어린 시절을 겪은 분입니다. 전쟁 후 어린 시절 동두천의 후미진 어느 골목에 엄마와 살던 지미는 분명 보통 한국인의 외모가 아니었습니다. 머리가 심하게 꼽슬인데다가 피부색이 유난히 검고 얼굴이나 몸도 아프리카 사람 냄새를 풍깁니다. 그는 한국 전쟁이 끝날 즈음에 태어났습니다. 미군들이 대부분 본국으로 돌아갔지만 지미의 어머니는 미국으로 돌아가는 지미 아버지의 선택을 받지 못했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누가 지미의 아버지인지를 확실히 할 수 없었습니다. “양공주”라고 불리우던 지미 어머니의 특별한 “직업” 탓이었습니다.
아버지를 모르는 지미는 동네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의 멸시와 놀림의 타겟이었습니다. “애비 없는 자식" 혹은 “애비도 모르는 자식”이 지미의 이름을 대신했습니다. 그 이름들이 편안한 옷과 같이 되어 버린 국민학교 6학년 어느 일요일 소년 지미는 댕강댕강 교회 종소리를 듣다가 문득 교회에 가고 싶어졌습니다. 일요일마다 깨끗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애들 손을 잡고 가서 함께 노래도 부르고 목사님 말씀이 끝나면 점심도 먹는다고들 했습니다. 지미는 자기도 그런 곳에 가서 앉아 있고 싶었습니다. 단지 그것뿐이었습니다. ‘제가 여기 왜 왔냐’는 듯이 자신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아이들과 어른들의 시선들 속에서 그 이상은 무리임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지미는 예배 시작 직전에 들어가서 예배가 끝나자 마자 얼른 나오는 식으로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두어 달이 지난 어느 날 일이 나고 말았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학교 친구 하나가 시비를 거는 바람에 예배당을 얼른 빠져나가지 못하고 사람들 뒤에 막히고 만 것입니다. 누구라도 말을 걸면 어쩌나, 누가 혼을 내면 어쩌나 조마조마 발을 동동거리며 굼뜨게 빠져나가는 사람들 뒤를 따르고 있는데, 큰 손 하나가 오른쪽 어깨를 살포시 잡았습니다. “야 네까짓게 여기에 왜 와!” 하고 아까 그 친구의 아빠가 혼낼 것 같아 다리가 굳어 버리는 듯한 긴장으로 잔뜩 겁먹은 꼬마는 얼굴을 천천히 돌렸습니다.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키큰 어른은 목사님이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의 얼굴이 환하게 미소짓고 있었습니다. 자신을 향해 웃어주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 어리둥절한 지미에게 목사님의 말이 하늘에서 나는 천사의 목소리처럼 들렸습니다. “지미야, 오늘부터 하나님이 네 아버지야. 앞으로는 누가 ‘네 아버지가 누구냐’ 하고 물으면, ‘하나님입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해. 알았지?”
“바로 그날 나는 하나님의 아들로 다시 태어났어.”
자신이 크리스챤이 된 날을 추억하는 60 후반의 중후하고 점잖은 신사가 된 지미 형제의 고즈넉한 미소 속에서 차오르는 눈물이 반짝반짝 빛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