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Blessed are those who hunger and thirst for righteousness, for they shall be satisfied.
Hunger는 배고파하다, thirst는 목말라하다는 의미다. 베고픔이나 목마름의 대상은 for로 나타낸다. 의를 배고파하고 목말라 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역시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for로 앞 뒤 두 문장이 연결되어 있다. 복이 있는 이유는 그들이 만족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Shall은 역시 하나님이라는 제3자의 의지를 나타낸다. Satisfy는 만족시키다, 만족을 주다는 의미의 동사인데, 무엇인가를 만족시켜 주는 것이므로 무엇을에 해당하는 목적어를 취하는 타동사이다. 타동사라고 하는 이유는 자신이 아닌 다른 것 즉, 대상인 목적어에 어떤 영향을 준다는 의미다. 즉 다른 대상에 대하여 주어가 행하는 동작을 나타낸다.
They shall be satisfied.
이 문장은 수동태 즉, passive voice이다. 수동태란 타동사의 동작의 대상이 되는 목적어를 주어로 사용해서 작성한 문장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만족시켜 주실 것이다’라는 문장은 God will satisfy them이다. 여기서 satisfy는 타동사, them은 동사의 목적어이고, God은 주어이며, will은 주어의 의지를 나타내는 조동사이다. 이 문장을 목적어인 them을 주어로 바꾸려면, 목적격인 them은 주격인 they가 되고, will은 주어의 의지를 나타내므로, 제3자의 의지를 나타내는 shall로 바뀌고, satisfy는 수동태인 be satisfied로 된다. 능동문의 주어인 God은 행위를 행하는 자를 나타내는 전치사 by를 써서 by God이 된다. 그래서, 수동태 문장은 They shall be satisfied by God이 된다. 물론 오늘 본문에서는 by God은 생략되었다고 볼 수 있다.
참고로, 수동태의 문장은 쓰지 않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무엇보다, 수동태 문장은, 그 의미를 이해하기 어렵다. 나아가서, 행동의 주체가 주어가 아니기 때문에 의미가 불분명하다. 글을 읽거나 말을 듣는 사람은 글이나 말에 확신이 부족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특히, 한국어에는 수동태와 같은 형식을 띠는 문장들이 많으므로, 영어로 작문을 할 때에는 수동태의 의미를 가진 우리 말을 그대로 직역하기 보다 주어나 동사를 바꾸어 능동태로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 예를 들면, “내 눈에 그렇게 보였어요 (들렸어요)”라는 말은 수동태의 의미다. 그래서, 이말을 직역하면, “It was seen (sounded) like that to my eyes (ears)”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동사를 바꾸면 능동태로 쓸 수 있고 문장이 자연스러워 진다. 즉, “It looked (sounded) like that to my eyes (ears).”
성경해설
자, 그럼 이 구절을 음미해 보자. 의에 대해 배고파하고 목말라한다는 것은 의에 갈망하고 갈급해 한다는 의미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의가 무엇인가가 중요하다. 의, righteousness는 옳은 것, 바른 것, 선한 것을 말한다. 의에는 좋지 않은 것이나 옳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면 뭐가 옳은 것, 바른 것, 선한 것인가?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든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것은 어떤 것도 의로운 것이 아니다. 산상설교는 의가 무엇이고 그 의를 어떻게 행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는 예수님의 말씀이다. 따라서, 계속 읽어나가다 보면, 의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는 지금 이 구절이 말하는 바와 같다. 의를 행하기 위해 의가 무엇인지 알기를 갈망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그것을 알게 해 주신다. 즉 그 갈망을 만족시켜 주신다. 물론, 의가 무엇인지를 알고 행하려는 갈망을 가진 사람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그것을 행할 수 있는 기회와 힘을 주심은 말할 필요도 없다.
중요한 것은 의에 대한 갈급과 갈망을 가지는 것이다.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의에 주리고 목마르는 심령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이 세상은 ‘그런 게 나와 무슨 상관이야? 내 일만 잘 하면 되지’라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되었다. 그래서 의에 대해 갈망과 갈급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마치 딴 세상 얘기처럼 혹은 이상주의자의 공허한 연설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앞서 말한 divine reversal을 생각해 보라. 자신의 일을 잘 돌보아서 이 세상에서는 잘 살고 있는 것같이 보이지만, 영원한 영적인 세상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잠시 ‘천국’에서 사는 것처럼 살고 있을지 모르지만, 영원한 세계인 영적인 세상에서는 지옥에서 살고 있을 수 있는 것이다.
5장 17절부터 의에 대해 다시 말씀을 하시지만, 의는 제자들에게 잃어서는 안 되는 생명이다. 우리에게 천국에서의 영원한 삶을 주는 생명이라면 어느 누가 왜 갈급하고 갈망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좋은 소식은, 아직 그것이 무엇이고, 나아가 그것을 어떻게 얻을 수 있을지 전혀 몰라도, 갈망하고 갈급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채워주신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전해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니 왜 믿지 않고, 왜 갈급과 갈망을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