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0 Blessed are those who are persecuted for righteousness’ sake,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Who are persecuted는 관계대명사 절로서 선행사 those를 수식한다. 앞서 본 바와 같이, 관계대명사절도 절이므로 그 안에 기본 문장이 있다.
관계대명사가 이끄는 문장인 관계대명사절과 주된 문장은 관계대명사로 연결된다. 관계대명사가 접속사와 같은 역할을 한다. 관계대명사가 접속사와 다른 점은 관계대명사는 관계대명사절의 한 문장 성분으로서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관계대명사절에서 주어의 역할을 하면 주격 관계대명사라고 하고, 목적어의 역할을 하면 목적격 관계 대명사라고 한다. 본문에서는 who가 관계대명사절의 주어의 역할을 하고 있으므로 주격관계대명사다. 영어를 잘 하기 위해서 반드시 매스터해야 할 것이 바로 이 관계대명사이다. 관계대명사를 자유자제로 사용할 수 있어야 자신의 생각을 정확하고 간결하게 표현할 수 있다. 관계대명사가 나올 때마다 주의깊게 보기 바란다.
For righteousness’ sake는 이유를 나타내는 부사어다. 여기 for는 바로 뒤에 나오는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for와 달리, 이유나 목적을 나타내는 전치사이다. 전치사는 항상 다음에 명사 혹은 명사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단어(명사 상당어구)들이 나오는데, 전치사 다음에 나오는 명사 혹은 명사 상당어구를 전치사의 목적어라고 한다. 마치 타동사의 동작의 대상이 되는 명사 혹은 명사 상당어구를 동사의 목적어라고 하는 것과 같다. 전치사와 목적어를 합하여 전치사구라고 부른다. 여기의 for-전치사구는 무엇 때문에라는 의미다. 특히 원인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명사를 소유격으로 만들고 sake를 붙이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for righteousness라고 해도 의로 인하여, 의를 위하여라는 뜻이 되지만, for righteousness’ sake는 의로 인하여, 의를 위하여 라는 의미가 강조된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눈여겨 보고 넘어갈 것은 righteousness를 소유격으로 만들 때 apostrophe(‘)만 붙이고 s를 붙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for … sake 구에서 명사의 발음이 /s/로 끝나는 경우의 예외이다. 이 외에도 for conscience’ sake도 한 예이다. 하지만 for my name’s sake와 같이 for …’s sake가 일반적인 형태다.
여기서 잠깐 전치사와 부사의 구분에 대해 짚고 넘어가자. 전치사처럼 보이는데 목적어가 없다면 대부분 부사이다. 예를 들면, 5장 1절에서 보았던 Jesus went up on the mountain에서 up은 전치사처럼 보인다. The mountain은 on의 목적어로 쓰이고 있으므로, up의 목적어는 없다. 따라서 이 up이 위로 라는 의미의 부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on이 없이 went up the mountain이라고 쓰였다면 up은 전치사이다. 물론 뜻은 위로 라는 의미다. 이런 예들은 많다. Come on에서 on의 목적어가 없으므로 여기서 on은 계속하여 라는 의미를 가진 부사다. Shut up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목적어가 없으므로 up이 부사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때 up은 완전히 라는 의미다. 이렇게 전치사로만 알고 있었던 단어들이 부사로 쓰이는 경우가 많은데, 그 의미도 다양하다. 또한, 이 부사 혹은 전치사들이 동사와 합해서 만들어내는 동사구들은 영어에서 수도 없이 많이 쓰인다. 이런 동사구들을 잘 알아야 한다. 예를 들며, get down, get in, get on, get up, get off, get out 등을 잘 알고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이런 동사구들을 공부하는 노하우는, 매우 자주 쓰이는 come, go, make, give 등과 같은 동사들을 사전에서 찾는 것이다. 어떤 사전에는 동사들의 의미나 용법만이 아니라 동사구들을 많이 소개하고 있다. 사전은 Oxford, Merriam Webster, Dictionary.com등이면 충분할 것이다. 영어를 배우는 목적으로 사전을 찾는 분들에게는 Oxford Learner’s Dictionary를 추천한다. 단어의 의미 뿐아니라 수많은 사용 예문들을 소개해 주기 때문이다.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의를 인하여 혹은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는데, 그 복의 내용이 무엇인가를 이 문장이 말해준다. 천국이 저희 것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천국에 반드시 간다는 의미다. 이 문장은 5장 3절에서 이미 살펴보았다.
성경해설
팔복의 마지막 복을 천명하신 이 구절을 이해해 보자. 핍박을 받는데 복이 있다? 또 하나의 divine reversal이다. 이 세상의 관점에서는 핍박을 받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나라의 관점에서는 복이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이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는 반대가 되는 것이 많다. 그런데, 왜 이 세상에서 핍박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복이 있는 것일까? 그 핍박을 받게 되는 이유 혹은 목적과 관련이 있다. 그 이유는 의를 인하여 혹은 의를 위하여서다. 5장 6절에서 이미 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보았다. 의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삶과 연관지어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면, 의를 인하여 혹은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기 때문에 혹은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 핍박을 받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는데 왜 핍박을 받는다는 걸까? 이것은 예수님의 삶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요한복음 6:38; 히브리서 10:7), 즉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셨는데(요한복음 8:29), 결국 어떻게 되었는가? 죽임을 당하시기까지 핍박을 받으셨다. 사도 바울도,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면 반드시 핍박을 받는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디모데후서 3:12). 그런데, 이를 두고 불공평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는 핍박을 받지만 하나님으로부터는 가장 큰 상인 천국을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divine reversal이다.
반드시 생각해 봐야 할 흥미로운 점은, 핍박을 받는 사람들에게도 5장 3절의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복과 같은 복을 주신다는 것이다. 주목할 것은 두 사람들에 대해 같은 복을 준다는 것보다 그 복이 천국을 주신다는 점이다. 즉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과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사람들에게 천국을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 이 사람들은 서로 다른 두 그룹의 사람들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과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사람들은 같은 사람들이라는 말이다. 즉,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은 의를 위해 핍박을 받고, 의를 인해 핍박을 받는 사람들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말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아니면 핍박을 무릅쓰면서 의를 행하지 않을 것이고, 핍박을 무릅쓰고 의를 행하지 않는 사람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아닌 것이다.
그 이유는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것이 심령이 가난한 것이고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반드시 의를 위해 핍박을 받기 때문이다. 먼저,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기 위해 핍박을 무릅쓴다는 것인데, 이는 자신의 모든 삶을 하나님께 의탁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즉, 세상에서 핍박을 받더라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만을 삶의 목적으로 삼을 정도로 하나님께만 의지하는 사람이 바로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다. 또한,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삶을 드리고 하나님께 의지하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행함에 있어서 결코 타협이나 굽힘이 없을 것이다. 타협하지 않고 굽힘없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데, 타협과 굽힘이 없는 삶이란 자기 중심적으로 산다는 의미가 전혀 아니다. 여기서 타협과 굽힘이란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들을 말하므로, 결국은 희생과 고난을 말한다. 즉, 아무리 힘들어도 굴하지 않고 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고난을 감수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심령이 가난한 것은 결코 유약함이나 비굴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들을 향해서는 한없이 자애롭고 온유하고 겸손하지만 하나님의 의를 지켜 행함에 있어서는 결코 타협이 없다.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즉 하나님의 뜻인 구원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데 끝없이 하는 것이니, 얼마나 강한 사람인가? 사도 바울의 예를 통해서 이를 볼 수 있다 (고린도후서 4:7-12).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고 의를 위해 희생과 고난을 감수하는 사람만큼 강한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은 결코 그러한 삶을 감당할 수 없다 (고린도후서 2:16).
그래서, 세상은 이런 사람들을 질시하고 싫어하고 마침내 자신들의 눈 앞에서 사라지게 하려 한다. 그렇게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을 모두 죽였고, 마침내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을 죽였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도들은 물론 모든 제자들을 핍박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만일 내가 핍박을 받고 있지 않다면 나는 심령이 가난한 자도, 의를 위해 살고 있지도 않은 것일 수 있다. 그렇다면, 천국이 나의 것일까?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들어보라!
팔복을 마치며
지금까지 팔복을 보았다. 영어에 관해서는 비슷한 문장들이 반복적으로 나왔기 때문에, 많은 내용을 다루지 못했다. 앞으로는 반복적인 문장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문장들이 나올 때마다 새로운 내용들을 배우고 생각해게 될 것이다.
말씀의 이해에 관해서는,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5장 3절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과 10절의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사람들에 대해 언급한 것과 같은 것이다. 즉 팔복을 받을 사람들은 각각 다른 여덟 그룹으로 나누어진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단 한 그룹의 사람들, 즉 전체 예수님의 제자들이다. 이를 이해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 팔복을 받기 위해 가져야할 심령과 태도 혹은 삶의 모습 중에 어느 하나를 가진 사람은 다른 모든 것들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다른 각도로 말하면, 어떤 심령, 태도 혹은 삶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이미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는 다른 심령, 태도도 거짓일 수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심령이 가난하면서 애통하지 않을 수 없고, 온유하지 않을 수 없고, 의에 주리고 목마르지 않을 수 없으며, 자애롭지 않을 수 없고, 마음이 순결하지 않을 수 없고, 화평을 이루는 자가 아닐 수 없고, 나아가 핍박을 받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연약한 인간인 우리들이 어떻게 이 심령과 자세를 다 갖출 수 있을까? 예수님은 이에 대해 어떤 답을 주실까? 계속 읽으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