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1 “Blessed are you when others revile you and persecute you and utter all kinds of evil against you falsely on my account. 12 Rejoice and be glad, for your reward is great in heaven, for so they persecuted the prophets who were before you.
Blessed are you when others revile you and persecute you and utter all kinds of evil against you falsely on my account.
이 문장은 팔복의 앞부분과 같은 구조다. 팔복은 모두 두 개의 문장이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for로 연결되된 문장이었는데, 이 문장은 for 접속사절이 없다. 복의 내용은 12절에서 별도로 설명해 준다.
Blessed are you
이 절에서 복이 있는 사람들은 어떤 심령이나 태도 혹은 무엇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you, 너희다. 어떤 마음의 태도를 가진 일반적인 사람들을 의미하는 the poor in spirit, those who mourn, the peacemakers 등에서, you로 변했다. You는 구체적으로 누구를 말하는 지 알 수 있는 사람들을 지칭한다. 여기 you는 설교를 하고 계시는 예수님이 바라보고 계셨을 제자들 및 그곳에 모인 사람들을 지칭한다. 그 자리에서 직접은 아니더라도, 후에 이 설교를 전해 듣거나 기록된 글을 읽는 사람들도 you에 해당할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you는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는 제자들을 의미한다. 주어가 바뀐 것은 설교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점이다.
예수님의 설교의 대상이 일반적인 사람들에서 구체적인 사람들로 바뀐 것을 이해하는 것은 팔복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하다. 특정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주어들을 사용한 것은 팔복이 모든 사람들에 대한 부름 혹은 초대의 역할을 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다시 말해 팔복은 모든 사람들에게 그러한 마음의 태도를 가지라고, 그러면 그런 복들이 있으니 그런 마음의 태도를 가지라고, 간절히 부르는 예수님의 초대이다. 다시 말하자면, 한마디로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이 되라’ 라는 초대 혹은 권면이다. 팔복의 복들은 사람들에게 그 초대에 응하여 변화를 받게 하기 위한 동기를 부여할 뿐아니라 그 결과에 대해 보증을 해주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아이러니컬하게도 팔복의 핵심은 복들이 아니라 복을 받기에 합당한 여덟가지 마음의 태도를 가지라는 부르심이다. 이런 의미에서, ‘팔복 beatitudes’라는 제목은 부르심이라는 예수님의 의도보다는 복을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욕망을 반영한 제목이다.
You로 표현된 구체적인 사람들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예수님의 제자들을 말한다. 그렇다면, 누가 제자인가? 바로 팔복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초대를 받아들이고 그런 마음의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다. 즉, 예수님의 그 부르심에 순종하여 따르는 사람들이다. 여기서부터 설교는 이 제자들을 향한다. 다시 말하면, 팔복에서 말한 마음의 변화를 받아 예수님의 제자가 된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닌 사람들에게 나머지 설교는 적용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은 다시 팔복으로 돌아와서 먼저 그런 마음의 태도를 가진 사람으로 거듭나야 한다.
이는 매우 중요한 것인데, 놓치고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설교의 나머지 부분은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은 설교의 나머지 부분에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계명을 지키는 것은 물론 이해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오직 팔복에서 말한 그런 마음의 태도를 가진 사람들만이 그 계명을 지킬 수 있다. 나중에 보겠지만, 그 계명은 한마디로 “사랑하라”는 것인데 팔복에서 가르치신 그 마음을 갖지 못한 사람에게는 불가능하다. 심지어, 그런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 이해할 수조차 없다. 그런 사랑은 불가능하다거나, 예수님만이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며 자기 자신은 그런 사랑을 해야 할 사람으로부터 제외시킨다.
예수님의 제자도는 예수님께서 나머지 설교에서 하시는 말씀을 율볍을 지키듯이 ‘지키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런 것이라면, 율법의 행위로는 구원받을 자가 없다는 성경의 원칙과 정면으로 반대된다 (로마서 3:28; 갈라디아서 2:16 참조).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예수님이 가르치시고 예수님께서 본을 보이신 그 마음의 태도, 정신으로 사는 것이다. 영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요한복음 3:5). 영으로 거듭나면 거듭나게 한 그 영으로 산다 (갈라디아서 5:25). 사람을 거듭나게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성령, 즉 하나님의 영이시다. 그러니, 영으로 거듭난 사람은 영적인 존재이고, 이제 그 영으로 산다. 더 이상 그 사람의 영으로나 생각으로 살지 않는다. 그 사람의 새 삶은 그 사람 안에 있는 성령이 사는 것이지 그 사람의 옛 사람이 사는 것이 아니다 (갈라디아서 2:20 참조).
이는 ‘율법을 지키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율법을 지키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그런데, 그렇게 지키고자 해서 '지키는' 경우에는 온전할 수 없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그 사람 안에 계신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하는 삶에 '순종'하는 것은 지키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순종하는 것은 그렇게 '사는' 것이다. 즉, 그 사람의 마음과 삶이 일치하여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서는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고 표현한다. 나무가 열매를 맺으려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나무이기 때문에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여 그 열매를 맺는 것이다. 나무를 자라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시다 (고린도전서 3:7).
산상설교에서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계명들도 마찬가지다. 그것을 '내가' 지키려고 하면 지킬 수 없다. 오직 팔복에서 말씀하신 마음과 태도를 가진 사람으로 거듭나면 그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열매로서 맺힌다. 즉,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르며, 자비를 베풀고, 마음이 정결하며, 화평을 이루는 자가 되고, 나아가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 핍박을 받는 자는 산상설교에서 가르치시는 계명들이 삶을 통해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된다. 그런 삶이 제자들을 통해 맺는 '예수님의' 열매다 (요한복음 15:5 참조).
이것은 다시 팔복의 의미를 정확하게 말해준다. 팔복의 핵심은 복이 아니라, 부르심이다. 그리고 그 부르심은 그런 여덟 가지의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거듭나라는 것이고,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라는 것이다. 이런 예수님의 부르심은 성경의 다른 곳에도 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11장 29-30절에서 말하는 예수님의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하니 예수님의 멍에를 지고 그에게서 배우라고 한 것도 같은 부르심이다. 온유하고 겸손한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라고 하지 않는가? 사도 바울도 같은 말을 했다. 즉,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겸손하시고 순종하시고 사랑으로 죄인들을 위해 돌아가시는 마음을 가진 분이기 때문이다 (빌립보서 2:5-8). 요한 또한 말하기를,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리라” (요한복음 14:15).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요한의 표현에 따르면,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영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요한이 자주 사용한 “~안에 거한다”는 그 생각을 표현한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하면 참된 제자가 된다고 하신 것이다. 이들 모든 경우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제자가 되는 것은 어떤 계명들을 지킴으로써가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과 정신으로 거듭남으로써 라는 것이다. 그렇게 거듭난 제자들은 그 삶속에서 예수님의 계명들이 가르치는 삶을 자연스럽게 나타내게 된다. 마치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가 포도를 맺듯이. 팔복의 대상인 인간 일반에서 you로 설교의 대상을 바꾸신 것에는 이렇듯 큰 의미가 있다.
When others revile you and persecute you and utter all kinds of evil against you falsely on my account
복이 있는 사람들 즉, you를 설명하는 말도 팔복에서와 같이 형용사나(3, 5, 7, 8절) 관계대명사(4, 6, 10절) 혹은 명사로(9절)로 표현하지 않았다. When이라는 때를 나타내는 접속사가 이끄는 문장을 사용했다. When은 현실 속에서 실제로 행하는 것을 나타낸다. If 즉, 가정을 나타내는 접속사도 비슷한 의미로 쓰일 수 있다. 그런데 if는 가정적이다. 가정을 해서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when은 어떤 사실이 나타난다는 전제 하에, 그 전제가 현실로 이루어질 때를 지칭한다. 즉, 이 접속사는 ‘그렇게 해야만 … 한다”는 의미로, 실제로 해야만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Others는 불특정한 사람들을 말한다. Revile은 영어로는 경멸섞인 또는 인격을 무시하는 말로 심하게 공격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어 원어는 정당한 이유없이 흠을 잡아 사람을 깎아내리기 위해, 비난하거나, 놀리거나, 모욕적인 말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Persecute는 핍박을 가하고 박해하는 것을 의미함은 이미 10절에서 보았다. Utter는 영어로는 소리를 낸다는 뜻이다. 물론 speak이나 say로 보통 표현하는 말을 하는 것도 소리를 내는 것에 포함된다. 원어는 말을 하다는 뜻인데, 번역자가 utter를 택한 이유는 악을 뿜어낼 때 말이 아닌 소리로도 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따라서 악한 말을 포함해서 모든 종류의 악을 입을 통해 뿜어내는 것을 표현한다. 그런데 그 악을 뿜어내는 대상이 you이다. 공격 혹은 반감 등의 대상을 표현하는 against가 사용되었다. 그리고 revile, persecute, and utter all kinds of evil을 하는 근거는 falsely 즉, 거짓이다. 아무런 합당한 근거나 이유가 없다. 잘못이 없는데 생트집을 잡아 혼을 내고 비난하고, 거짓을 꾸며서 비판하고, 없는 죄나 책임을 뒤집어 쒸워서 핍박을 할 뿐아니라, 욕을 하고 나쁜 말을 하고 위협과 협박을 한다. 그리고 이 모든 악행들은 모두 거짓에 기반한 것이다. 참으로 악한 행위다.
그런데, 그 욕과, 핍박과, 중상모략의 이유가 on my account ‘나로 인하여,’ ‘나 때문에’다. 즉 예수님으로 인해서다. 다시말하면, 예수님을 믿고 따르고, 예수님의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로 그 모든 억울한 일들을 당하는 것이다.
Rejoice and be glad, for your reward is great in heaven, for so they persecuted the prophets who were before you.
네 개의 문장으로 한 문장을 구성했다. 가장 주된 문장은 명령문 rejoice and be glad이다. 이유를 나타내기 위해 접속사 for를 사용했다. 두번째 for는 접속사로 또 하나의 기뻐하고 즐거워할 이유를 나타낸다. "그들"은 앞서서 말한 불특정한 사람들 others를 받는 대명사이다. "그들"이 선지자들을 핍박했었다. 어떻게? So, 그렇게. 그렇게 어떻게? They reviled [the prophets] and persecute [the prophets] and utter all kinds of evil against [the prophets] falsely on [God’s] account. 네번째 문장은 관계대명사절이다--Who were before you. 이 절은 the prophets를 설명해 준다. 즉 너희들 전에 있었던 선지자들이라는 말이 된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거나 선포하는 사람을 말한다.
예수님의 참된 제자들은 반드시 핍박을 받게 되어 있는데, 그렇게 핍박을 받을 때 그 복이 확정된다. 팔복에서 가르치신 마음과 태도를 가지고 사는 것이 옳다고 믿고 아멘할 때도, 그렇게 살겠다고 굳은 결심을 할 때도, 나아가 그렇게 살아야한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힘주어 가르친 때도 아니고, 그렇게 살아 핍박을 받을 때 그 복이 현실이 된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받느니라” 함과 같다 (로마서 10:10). 마음으로 믿어 의롭다고 여김을 받기는 하지만, 입으로 고백하지 않으면, 즉 그 의를 삶 속에서 나타내지 않으면 아직 구원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10절에서도 간단히 보았지만, 여전히 의문이 시원하게 가시지 않는다. 왜 훌륭한 크리스챤으로 사는데 핍박과 억압을 받을까? 나는 잘 믿고 있지만 핍박을 받고 있지 않은데 … 무슨 소린가? 예를 통해 생각해 보자. 지금 한 친구가 사람들로부터 안 좋은 일을 당하고 있다. 그 친구가 정말 잘못을 했는지 안 했는지 상관없이, 그 친구가 그런 잘못을 한 것처럼 말하는 증언 혹은 그렇게 보이게 하는 증거들이 있고, 사람들은 그를 비난하고 멀리한다. 그 친구를 동정하고 같이 어울리는 친구들마저도 잘못을 두둔한다는 오해를 받을 상황이다. 분위기가 험악하다. A는 누명을 쓴 그 친구가 정말 잘못을 했는지 안했는지는 모르지만, 친구로서, 나아가서 한 인간으로서 그런 상황에 처한 그 친구가 너무도 불쌍하다. 그래서, 다른 모든 친구들이 그 친구를 핍박하거나 외면하지만 그 친구의 곁에서 위로해 주고 힘을 주고 때로는 다른 사람들의 공격을 대신 맞아주기도 한다. 그 친구와 함께 해 준다. 이제 A도 누명을 쓴 친구와 내통을 했거나 연관되어 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고, 어떤 사람들은 급기야 무언가 잘못을 한 것처럼 A에게도 핍박과 억압을 한다.
A는 예수님을 인하여 거짓으로 욕을 먹고 핍박을 당하고 온갖 악담을 듣는 사람과 같다. A는 선지자들이 받았던 핍박을 받았으므로 하늘 나라에서 선지자들이 받는 상을 쌓고 있다. 그리고, 어려움을 무릅쓰고 예수님의 가르침 대로 사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므로, A는 의를 행한 것이고 그 의로 인하여 핍박을 받은 것이니, 5장 10절이 말하는 복이 있는 사람이다.
B는 험악한 상황이 무섭다. 그 잘못을 했다고 핍박을 받고 있는 친구가 안쓰럽고 측은하기는 하지만, 그 친구를 도와주었다가 A처럼 오해를 받고 심지어 핍박을 받을 것을 생각하면 무섭다. 친한 친구들이 다 그 친구를 손가락질하고 있는데, 그래도 친구를 사랑해 주자고, 불쌍히 여기자고 했다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당할까봐 겁이난다. 괴롭지만 억울하게 핍박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친구들을 잃지 않기 위해서 B는 침묵한다. 오히려 핍박에 적극적인 친구들에게, 적극적으로 같이 하지는 않더라도, 소극적으로나마 동조한다.
B는 예수님으로 인해서 욕을 먹지도, 핍박을 당하지도, 악한 말을 듣지도 않는 사람을 대변한다. 마음으로는 힘든 상황에 있는 친구들을 동정하지만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도 못한다. 핍박하는 자들과 사랑하는 자들 둘로 나눈다면 B는 당연히 핍박하는 자들 속에 들어갈 것이다.
예수님도 그 억울한 친구와 같은 상황엔 처하셨다가 마침내 죽임을 당하셨다. 예수님이 뭘 잘못했는지 사람들은 몰랐다. 그냥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 그리고 서기관들이 죽을 죄를 지었다는 증언을 들이대었다. 그 사람들 중에는 예수님의 도움으로 병이 나았거나 장애에서 해방되거나 혹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 진리를 깨달았다고 좋아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 하나 예수님을 변호해 주지도 혹은 공개적으로 동정을 표해 주지도 않았다. 심지어, 열두 제자 중에 가장 신임을 받았던 베드로마저 예수님을, 그 험악한 분위기가 겁나서, 부인하고 말았다.
사랑의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신을 희생하기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의 제자로서 산다는 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사랑을 베풀고 긍휼을 베풀고 그 사람을 보듬아주고, 보호해 주고, 나아가서 아픔을 나누는 것이다. 그 상대방이 무슨 잘못을 했다고 해서 그 사랑이 달라져서는 안 된다. 잘 한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많다. 당연한 것을 하는 것에 대해 상을 주지 않지 않는가?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 하고 핍박하고 멀리하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사랑해주면 A와 같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디모데후서 3:12 참조). 아니 A와 같이 되지 않고서는 진정으로 그렇게 할 수 없다. 핍박을 받지 않고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는 길은 없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라고 하신 것이다 (요한복음 1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