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A city set on a hill cannot be hidden. 15 Nor do people light a lamp and put it under a basket, but on a stand, and it gives light to all in the house.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기본문장은 you are the light 이고 of the world는 전치사구로서 light을 꾸며주는 말이다.
Are는 be 동사의 현재형으로서 주어가 복수일 때와 2인칭 단수인 you에도 사용된다. 참고로, 1인칭 단수에는 am이 3인칭 단수에는 he/she/it에는 is가 사용된다. 과거형은 주어가 단수일 때는 was이고 복수일 때는 were이다. 과거분사는 been이고 현재분사는 being이다.
Be 동사의 의미는 문맥에 따라 다양하지만, ‘~이(었)다’의 뜻이다. 가장 많이 쓰이는 의미다. 이때 ‘무엇(~)”에 해당하는 것은 보어다. 보어란 문장속에서 어떤 동사(구)를 보충해주는 역할을 하는 성분이다. 주어를 보충해 주면 주격 보어, 목적어를 보충해 주면 목적격 보어이다. 앞 구절 5장 8절에서 They shall be called sons of God이라는 문장을 설명했는데, 여기의 sons가 바로 주격 보어이다. God을 주어로 한 능동태 문장은 God will call them sons of God인데, 여기의 sons는 목적어인 them을 보충해 주므로 목적격 보어다. 보충해 주는지를 확인하는 방법은 be 동사를 이용해 문장을 만들었을 때, 사실인지를 보는 것이다. 즉, 능동태 문장의 경우에, 주어와 연결시켜 보면, ‘God is sons’가 되는데 사실이 아니다. 따라서 주격 보어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목적어인 them을 주어로 바꾸어 문장을 만들어 보면, ‘they are sons’가 되는데 이는 사실이므로 목적어를 설명해 주는 목적격 보어임을 확인할 수 있다. 수동태의 경우도 ‘they are sons’는 사실이므로, 주격 보어임이 확인된다.
Of는 영어 단어 중에 가장 자주 쓰이는 단어이자 전치사이다. 그러므로 of와 결합되어 쓰이는 phrase들을 사전을 통해 공부하면 영어 실력 향상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Of는 주로 소유를 나타낸다. ‘~의’라고 해석하면 된다. 사람과도 사물과도 쓸 수 있다. 사람일 때는 Mike’s와 같이 어포스트로피 (apostrophe)와 s를 사용하고 사물일 때는 주로 of를 사용한다고 설명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런 구분은 점점 더 사라지고 있다. 문맥은 물론 가독성을 고려해서 어색하지 않게 사용하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용적으로 of로 대체하지 않고 apostrophe + (s)를 사용하는 경우들도 알아두어야 한다. 예를들면, 무엇 때문에라는 의미로 —’s sake를 쓰는 경우가 그렇다. 5장 11절에 for righteousness’s sake (의를 인하여 혹은 위하여)도 그 예이다.
Of는 소유의 의미 뿐 아니라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 몇 가지만 예를 들면, ~중에 (one of them), ~으로부터 (out of), ~ 에 대해 (know of) 등이다. 마지막 예에 대해서는 주의를 할 필요가 있다. 문법책에는 이런 의미를 강조하지 않았는데, 원어민들은 자주 쓰는 용법이다. 예를 들면, 당신을 생각한다고 할 때 think about you라고 하지만 of you를 사용할 수 있다. 옥스포드 영어 사전에 따르면, think of는 과거에 있었던 일에 대해 ‘상기하다, 기억하다’라는 뜻인 반면에, think about은 ‘고려하다, 숙고하다, 사색하다’라는 뜻이다. 호주의 한 언어학자에 따르면, think of는 과거의 기억이나 경험을 돌이켜 생각하는 것에 사용되는 경향이 있는 반면, think about은 추상적인 아이디어나 컨셉을 고려라는 경우에 사용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About이 그 대상의 총체적이 것에 대한 것을 의미한다면, of는 대상의 특정한 혹은 한정된 것에 대한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know와 함께 사용하면, know of는 대상의 구체적인 특징을 아는 것을 말할 때 쓰고, know about은 그 사람에 대해 무엇이든지 한가지라도 안다는 의미로 쓴다.
A city set on a hill cannot be hidden.
이 문장의 기본문장은 A city cannot be hidden이다. Set on a hill은 city를 수식하는 역할을 한다. 여기의 set은 과거분사다. Set은 과거나 과거분사 모두 같은 모양이다. Set은 여기서 맞추다, 정하다, 혹은 세우다의 의미다. 과거분사이므로 수동의 의미로 해석한다. 과거분사가 바로 명사상당어구 다음에 와서 수식을 하는 경우가 흔하다. 이의 문법적인 설명은 city와 set 사이에 which is 즉, 관계대명사 주격과 be동사가 생략되었다는 것이다. 생략하지 않고 문장을 다시 쓰면, A city which is set on a hill …. 관계대명사 절이 그 안에 있었는데, 그 절의 주어와 동사가 생략됨으로써 수식어구로 보이는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이렇게 절이 구로 변하여도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는 경우는 주격 관계대명사와 be동사가 생략되는 경우라는 점이다. 주격 관계대명사가 아니거나 be동사가 아닌 경우는 해당되지 않는다. 이런 문장을 연습해 두면, 문장을 간략하게 할 수 있어 말이나 글을 더 깔끔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분사인 경우와 현재분사인 경우의 예를 각각 몇 개씩 들자면:
과거분사인 경우
The book that was written by J.K. Rowling is a bestseller.
= The book written by J.K. Rowling is a bestseller.
The movie which was directed by Steven Spielberg won an Academy Award.
= The movie directed by Steven Spielberg won an Academy Award.
The cake which was baked by my mom was delicious.
=The cake baked by my mom was delicious.
현재분사인 경우
The man who is standing over there is my brother.
=The man standing over there is my brother.)
The cat which is sleeping in the garage is mine.
=The cat sleeping in the garage is mine.
The dog that is barking loudly belongs to my neighbor.
=The dog barking loudly belongs to my neighbor.
A city cannot be hidden은 수동태이다. 능동태로 바꾸면 이런 경우는 주어를 nobody를 사용하면 좋을 것같다. 즉, Nobody can hide a city.
Nor do people light a lamp and put it under a basket, but on a stand, and it gives light to all in the house.
Nor는 and와 not이 결합된 접속사다. 이렇게 한 단어이지만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는 접속사는 unless와 lest가 있다. Unless는 if ~ not, lest는 so that ~ not ~의 의미다. Nor가 문장의 맨 앞에 나오면 주어와 동사의 어순을 바꾸기도 하는데, 동사가 일반동사인 경우에는 조동사 do를 먼저 쓰고 주어 다음에 본래 동사의 원형을 쓴다. 이 경우 본래 동사의 시제와 인칭은 조동사 do에 적용한다. 본문을 예로 들자면, 과거라면, Nor did people light …, 3인칭 현재단수라면, Nor does he light …이 된다. 이 문장은, ‘어느 누구도 램프를 켜서 바구니 아래 두는 사람은 없다’고 해석할 수 있다.
…, but on a stand는 not … but이라는 서로 대조적인 의미의 문장들을 연결시켜 만든 문장이다. 의미는 ~이 아니라 ~이다, ~하지 않고 ~한다 등이다. 즉, 여기까지의 문장은, ‘어느 누구도 램프를 켜서 바구니로 덮어 두지 않고 촛대 위에 둔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And it gives light to all in the house에서 and는 당연한 결과를 나타낸다. 그러면, 그래서 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면, 그것(램프)은 집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어 준다.’
All in the house는 앞서 명사와 과거분사구 혹은 현재분사구 사이에 주격 관계대명사와 be동사가 생략된 경우와 같이 볼 수 있다. 즉, all과 in 사이에 who are가 생략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말하고 싶은 것은, 영어에서 관계대명사가 얼마나 자주 광범위하게 쓰이는가 하는 점이다. 생략되었다고 볼 수 있는 관계대명사들까지 포함하면 훨씬 더 많은 문장들이 관계대명사를 포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영어를 잘 하려면 반드시 관계대명사의 사용을 마스터 해야 한다.
성경해설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이 말씀은 소금이 소금기를 잃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하신 13절의 소금에 대한 가르침과 연관지어 생각해야 한다. 어떤 물질이 그 물질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서 반드시 있어야 하는 그 핵심적인 특징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빛도 마찬가지다. 빛이 빛으로서의 가치를 가지기 위해서는 핵심적인 특징이 없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무엇인가를 다음 구절들에서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해 주신다. 그것이 무엇인가를 보기 전에 이 구절에 대해 몇 가지 더 생각할 것이 있다.
첫째는, 여기서 빛은 세상과의 관계에서 그 가치가 있다는 점이다. 빛이 세상에 대해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면 그 빛은 빛으로서의 가치가 없다. 마치 짠맛을 잃은 소금과 같다. 둘째는, 제자들이 바로 그 빛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제자들은 세상에 대해 어떤 가치를 가져야 한다. 가져야 한다기보다 발휘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더 옳을 것 같다. 이들에 대한 의미도 다음 구절들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본다.
A city set on a hill cannot be hidden.
이 구절을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은, 제자들은 언덕 위에 지어진 도성과 같이 숨겨져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마치 언덕 위에 지어진 도시처럼, 제자들이라는 빛의 광원은 언덕 위에 높이 솟아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설정하시는 제자들과 세상과의 관계를 엿볼 수 있다. 제자들은 세상에 대해 반드시 영향력을 발휘해야 한다. 물론, 16절에서 보게 되겠지만 그것은 선한 영향력이다. 그 영향력은 감추어져서는 안 되고 감추어 질 수 있는 것이어서도 안 된다. 언덕 위에 우뚝 솟아 있는 도성이 어찌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언덕 위에 세워진 도성은 외부의 영향을 제약적으로 받을 수 있다. 도성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각 방향에는 문이 있어 드나드는 사람들을 통제할 수 있다. 적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시설을 가지고 있다. 선한 의도로 도성에 드나드는 사람에게는 한없이 열려 있고, 득을 주는 곳이지만, 악한 의도를 가지고 도성에 몰래 숨어 들어오려는 적들에게는 난공불락이다. 이는 크리스챤들의 삶과 세상사람들과의 관계를 말한다. 크리스챤들의 삶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행하는 사람들이지만, 세상사람들로부터의 영향은 제약한다. 세상사람들의 세상적인 욕망에 휘둘리지 않을 뿐아니라, 그들의 세상적인 삶의 방식을 본받지 않는다. 그러나, 크리스챤들의 성경적인 방법, 사랑과 진리로 사는 삶을 엿보고 함께 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든 열려 있다. 열려 있는 정도가 아니라 그들에게 그런 삶을 보여주고, 그런 삶이 가져다 주는 복을 보여주고 나눈다.
그러나, 세상은 크리스챤들의 사랑과 진리로 사는 삶을 시기하고 질투하여, 맑을 물에 돌을 던지듯이 그 맑고 깨끗한 평화로운 삶을 헤치려 한다. 악한 세상적 사람들은 그래서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크리스챤들을 무너뜨리려 한다. 영적인 전투가 벌어진다. 사도들이 함께 하던 초대 교회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다. 크리스챤들이 살고 있던 평화롭고 자유로운 삶을 시기하여 파괴하기 위해 몰래 교회에 들어온 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갈라디아서 2:4). 이들은 광명의 천사의 너울을 쓴 사탄의 종들이었다 (고린도후서 11:13-15). 이들은 으르렁 거리며 사냥감 주위를 어슬렁 거리는 굶주린 사자와 같이 틈을 보이는 약한 자들을 노린다 (베드로전 5:8). 제자들의 세상과의 관계에서의 영향력은 이런 의미에서 일방적이어야 한다. 즉, 제자들은 세상으로부터 악한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되고, 오직 하나님과 다른 제자들로부터 선한 영향력만을 받아야 한다. 언덕 위에 서 있는 도성에 제자들을 비유한 예수님의 뜻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Nor do people light a lamp and put it under a basket, but on a stand, and it gives light to all in the house.
예수님은 이번에는 상식을 가지고 말씀을 이어가신다. 상식은 분명하다. 누가 촛불을 밝혀서 바구니 아래 두겠는가, 촛대 위에 두지 않겠는가? 어느 누구라도 촛불을 켠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반드시 그렇게 할 것이다. 너무나도 상식적인 말이기에 이견의 여지가 없다. 여기서, 우리는 ‘목적’이 있다는 것과 어떻게 되는 것이 그 목적이 성취되는 것인가를 살펴 볼 수 있다. 즉, 소금의 짠맛과 같은 필수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볼 수 있다.
먼저, 그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자. 즉, 그 목적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먼저 보자. 그것은 빛을 비추는 것이다. 촛불을 켰을 때 이미 빛은 있다. 그러나 빛이 있기만 하다고 해서 목적이 성취되지 않는다. 촛불을 켜서 바구니 아래 둔다면, 빛은 살아있지만 그 빛이 집안을 비추어 밝게 하지 못한다. 즉, 짠맛을 잃은 소금과 같이 아무런 소용이 없는 빛이 되고 만다. 여기서, 다시 언덕 위에 세운 도성에 대해 한 말씀이 같이 적용된다. 촛불은 세상과의 관련 속에서 가치를 가진다. 그것이 아무리 활활 타고 있어도 어두운 세상을 비추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짠맛 없는 소금처럼 밖에 버리워져 사람들의 발밑에 짓밟히는 것 외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 촛불이 그 빛을 어두운 세상에 비추게 하여 밝게 하는 것은 소금의 짠맛이 음식을 절이거나, 간을 맞추거나, 혹은 썩지 않게 보존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소금의 짠맛과 같이 소금이 잃어서는 안 되는 것은 촛불에 있어서는 빛을 비추는 것이다. 그렇다면, 촛불이 빛을 비추는 것은 제자들의 삶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
제자들의 삶은 어두운 세상을 사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빛을 비춰야 한다. 세상은 죄와 인간의 욕망으로 암흑 속이다. 그 속에 하나님의 구원의 빛이 비취게 해야 한다. 불을 밝히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사람들이 그 빛을 볼 수 있도록 빛이 퍼져 나가도록 해야 한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얻은 것은, 촛불에 불을 켠 것과 같다. 그런데, 그 빛이 사람들에게 비추어지지 않는다면, 그 것은 그 구원을 받은 사람이 마치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부터 보이지 않도록 숨겨져 있거나 혹은 빛이 없는데 빛이 있다고 착각하는 것과 같다. 즉, 그 사람으로부터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빛을 볼 수 없는 경우다. 그렇게 된 촛불은, 짠맛을 잃은 소금과 같이 길가에 버려지는 것 외에는 다른 운명이 없다. 다시 말하면, 그 사람은 구원은 받았는데, 그 구원으로 천국에 가지 못하고 지옥에 버려지는 운명인 것이다.
워우! 구원은 받았는데, 천국에는 못간다? 그렇다. 우리가 처음 구원을 받은 것은 구원의 길에 들어선 것이고, 그 길을 끝까지 가야지 우리는 천국 문에 이를 수 있다. 구원의 길에 올라섰다 하더라도 그 길을 가지 않고 다른 길로 가면, 구원의 길에 올라섰지만, 천국문에는 이르지 못한다. 물론, 다시 천국으로 가는 길로 올라설 수 있을 지도 모르겠지만, 성경은, 안타깝지만,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길은 없다고 분명히 말한다 (히브리서 6:6, 10:26, 29; 요한일서 5:16). 그래서, 예수님도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좁고 험난해서 그길을 찾는 사람이 많지 많다고 하신 것이다 (마태복음 7:14). 이들 모두가 천국으로 가는 길에 들어서기는 했지만 그 길을 끝까지 가지 않아 천국 문에 이르지 못한 경우들이다. 따라서, 촛불을 켜는 것도 중요하지만, 세상에 빛이 되도록 옳바른 삶을 삶으로써 그 빛이 세상의 어둠을 밝히도록 비추게 하는 것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이런 의미로, 빌립보서 2장 12절은 “두려움과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어 나가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목적에 대해 예수님은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촛불을 켜는 것을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것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목적이 바로 우리에게 주신 그 구원의 빛을 세상에 비추게 하시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놀라는 것은, 우리의 구원이 궁극적 목적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을 이해하는 것은 우리의 구원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위해 중요하다. 이에 대해서는 16절을 통해서 살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