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16-17)
로마서의 서문이라고 하는 구절이니, 이 짧은 구절 속에 로마서가 요약되어 있다는 뜻인데,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떻게 이렇게 짧은 구절이 로마서와 같이 엄청난 깊이의 성경을 요약한다는 말인가? 이것만 봐도, 이 말씀의 집필자는 사도 바울이라는 사람이지만, 과연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성경을 공부하는 은혜 중 하나는 이 구절과 같은 촌철살인의 구절들의 깊은 의미를 깨닫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니시고는 쓸 수 없는, 표현에 있어서는 간결하고 의미에 있어서는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그런 구절들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을 때, 자신도 모르게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로구나!”하는 탄성을 지르며 맛보는 은혜다. 성경 어디에나 그런 구절들이 있지만, 로마서나 산상설교는 특히 더 하다. 그 중에 하나가 이 구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 은혜는 그런 구절들의 뜻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맛볼 수 없다. 그러니, 그 뜻을 이해하려 하는 자의 설레임이 얼마나 하겠는가?
이 구절을 읽으면서 쉽게 알아챌 수 있는 것은 믿음이 강조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가장 큰 주제가 복음임은 그 첫 문장부터 분명하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아니하노니.” 그런데 단지 복음에 대해서만 말하려는 것이 아님을 조금 더 읽다보면 금방 알게 된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 이유를 말하면서 복음이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복음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고 그 이유는 그 안여기까지 볼 때 주제는 복음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저자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한 문장을 덧붙였다. 바로 “믿는 자들에게”라는 한정의 의미를 가지는 문장이다. 그러니까 복음은 하나님의 의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인데, 그 구원의 능력은 모든 사람에게 무차별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오직, 믿는 사람들에게 그렇다는 것을 이 덧붙인 말이 분명히 한다. 이처럼 “믿는 자들에게는” 가장 큰 주제의 적용 범위를 한정 짓는다. 관계대명사절인데,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 지를 알 수 있다.
잠깐 중학교 시절에 배웠던 문법을 하나 기억해 보자. 관계대명사절이다. 주어와 동사가 있으니 절이라고 하고, 앞에 나온 명사와 관계를 가진 대명사이니 관계대명사라고 한다. 이 관계대명사절은 앞에 나온 관계를 가지는 명사를 수식하는 역할을 한다. 수식을 받는 앞서 있는 명사를 선행사로고 하는데 기억나는가? 문장에서 수식한다는 것의 의미는 설명과 한정이다. 무엇보다, 수식 받는 단어를 보다 자세하게 설명해 주는 역할을 하는데,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다른 것들과 다른 점을 설명해 줌으로써, 보다 명확하게 대상을 한정해 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영어교실에서 관계대명사절을 잘 사용할 줄 아는 것이 중요함을 가르칠 때 이런 예를 들곤 했다: “나는 여자를 좋아한다”라고 말하면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는데 여기에 관계대명사 절을 써서 어떤 여자인지 설명을 하고 특정한 여자로 한정을 지으면 오해의 가능성을 없앨 수 있다. 영어로 그 문장을 표현해 보면, 오해 가능성이 높은 문장은 I love a woman 인데, 거기에 관계대명사를 붙이면, I love a woman who is my wife 하면 내 아내를 사랑한다는 말이 되니 오해의 가능성이 전혀 없다. 이와 같이 여자를 사랑한다는 광범위한 말의 범위를 확 줄여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관계대명사절이다. 그러니, 그 범위를 줄여주는 관계대명사 절은 본래의 주제만큼이나 중요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로마서 1장 16절에서 그런 역할을 하는 관계대명사절이 바로 “믿는 자들에게”이다. 그러니 이 “믿는 자들에게”는 “복음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라는 말 만큼이나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결국, 믿음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믿음의 중요성은 계속해서 드러난다. 두번째 문장은, 왜 복음이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인지를 설명하는데, 그 안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그 자세한 의미는 나중에 자세히 살펴볼 것이지만,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다는 것이 이 문장의 큰 주제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앞서의 문장에서와 같이 사도 바울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믿음으로부터 믿음에 이르는” 혹은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게 하는” 등으로 번역할 수 있는 구인 “from faith to faith”를 덧붙였다. 이번에는 전치사구로써 앞 문장에서 관계대명사절이 했던 것과 같이 설명과 한정의 역할을 하는 말을 덧붙인 것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는데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게 하는 것 혹은 “믿음으로부터 믿음에” 이르는 것이라고 설명 혹은 한정한다. 앞 문장에서와 같이 역시 주된 주제만큼이나 이 설명과 한정의 역할을 하는 말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데, 이 역시 믿음과 연관된 말이다. 결국, 이 두번째 문장에서도 믿음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세번째 문장을 보니 마찬가지로 믿음이 강조되고 그 중요성이 부각된다.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의인이 누구인가를 아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 당연히 자세히 살펴 볼 것이다. 그런데, 그 의인이 믿음으로 살 것이라고 한다. 역시 믿음이 등장하여 중요성을 다시금 느끼게 한다. 사실 이 말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라고 할 정도로 이 말은 이 구절에서 중요하다. 그런데, 이 문장은 사실은 앞서 한 말을 설명하기 위해 인용된 하박국 2장 4절에서 인용된 말이다. 다시 말하면, 이 말이 중요한 만큼 이 말을 인용해서 설명을 하고자 한 그 말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 말이 바로 “믿음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다” 혹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한다”로 번역되는 말이다. 나중에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여기서 특히 설명을 받는 것은 “믿음에서 믿음으로”다. 만일 이 어구가 없었다면, 굳이 하박국 2장 4절을 인용하여 설명을 하려 할 필요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결국, “믿음에서 믿음으로”를 이해하는 것이 로마서 1장 16절과 17절을 깊이있게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 다른 말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다른 말들을 이해하더라도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면 이 구절에 대한 가장 깊은 이해에 도달했다고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 책의 제목을 “믿음에서 믿음으로”라고 붙인 이유 중의 하나다. 따라서,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믿음에서 믿음으로”가 얼마나 중요한 말인지를 공감할 수 있게 되는 것이 내 소박한 바램이다. 참으로 대담한 표현이지만, 나는 네 단어로 이루어진 그 짧은 말 속에 로마서 전체가 요약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 말이, 표현은 간결하면서도 의미는 깊이를 다 알 수 없는,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만들어 낼 수 없는 말임을 공감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로구나!” 하는 은혜의 찬탄을 자신도 모르게 쏟아내며, 믿음의 토대가 이 말씀으로 인하여 한층 더 굳건해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