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 제1장--"믿음에서 믿음으로"

by 장민구 posted Nov 20,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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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믿음에서 믿음으로

 

 

 

 

산상설교의 “눈은 몸의 등불이니 눈이 밝으면 온 몸이 밝을 것”이라는 말을 이해했을 때가 기억난다. 예수님께서 무슨 의미로 왜 거기서 그 말씀을 했는지 알 길이 없어 1년 여를 씨름한 적이 있다. 이후 성경을 전공할 때 이 말의 해석 역사를 살펴 보았지만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 말을 거기서 하신 이유, 즉 문맥이 무엇인지를 명쾌하게 설명한 글을 찾아 보기 힘들었다. 이후 몇 년이 지나고 나서 나름대로 그 말의 의미와 문맥을 이해하게 되었는데 그 짧은 말 속에 구원은 물론 인간사에 대한 진리가 담겨 있음을 알았다. 그때 이런 의문이 들었다. 왜 예수님은 진리를 이렇게 이해하기 어렵게 가르치셨을까? 산상설교에는 중학생 정도면 충분히 이해할 만한 표현 속에 구원의 핵심적인 가르침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 바다 보다 깊은 의미의 한 조각을 깨달을 때, 두 가지 생각이 든다. 하나는 ‘역시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구나,’ 그리고 다른 하나는 ‘정말 중요한 진리는 이렇게 감추어 두시는구나.’ 심지어 예수님은 천국의 비밀을 그렇게 감추어 두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셨다 (마태복음 11:25-26). 

로마서 1장 17절에 있는 “믿음에서 믿음으로”도 그런 말 중에 하나다. 1장 17절은 16절과 함께 로마서의 서문이라고 보는 데 이견이 없다. 서문은 그 책의 길라잡이다. 그 책이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예고해 준다. 내용이 어렵거나 복잡하거나 너무 많아서 이해하기 힘들 때, 독자의 이해가 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를 판단할 수 있게 해 준다. 서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책의 내용을 엉뚱하게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서문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마치 집을 지을 때 모퉁이 돌을 제대로 놓는 것과 같다. 

로마서의 서문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주는 말이 “믿음에서 믿음으로”다. 따라서, 이 말이 로마서의 모퉁이 돌과 같은 서문을 이해하기 위한 키의 역할을 한다. 이 말을 이해해야 로마서의 서문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고, 그 서문의 길라잡이 역할을 통해 로마서 전체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 말이니 그렇게 이해하기 어렵게 해 놓은 것이 아닐까?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될 것이기에 진리에 귀기울이고 진리에 순종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쉽게 이해하여 로마서의 모든 진리를 깨우치게 될 것이다 (마태복음 13:12). 

먼저, 16절과 17절을 읽어보자. 

 

“16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17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사도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데, 복음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복음이 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인가 하면, 그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 있어서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하기 때문이다. 성경 원어는 그냥 “믿음에서 믿음으로”라는 말만 있고 “~에 이르게 한다”는 말은 없다. 그러나 이 번역은 가능할 뿐 아니라, 정확한 번역이다. 직역이 불가능하여 의역을 해야 하는 경우에 해당한다. “믿음에서 믿음으로”의 원어를 영어로 직역하면 “from faith to faith”다. ‘~에서 ~으로’는 출발과 방향을 가리킨다. 즉, 계속 혹은 성장의 의미를 내포한다.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이 계속 혹은 성장이라는 뉘앙스를 잘 반영한다. 출발에서 시작하여 계속되고 성장하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표현한다. 여기에 이 말의 중요성이 있다. 그러나 “믿음에서”와 “믿음으로”의 각각의 의미를 다 이해하기 전에는 복음이 왜 모든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인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이 말을 이해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자 그럼 “믿음에서”와 “믿음으로”를 차례로 살펴 보자.  

 

 

믿음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은 누구에게든—유대인에게도 헬라인에게도—차별없이 열려 있지만 오직 믿는 사람에게만 역사한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아무리 크고, 구원의 능력이 아무리 확실해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다. 믿음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그 사람에게 역사하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다. 복음을 들어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은 그 사람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다. 히브리서 4장 2절에 이에 대한 한 말씀이 있다. 모세의 인도 아래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조상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주셨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도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으로 인해, 그 약속한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 엎드러졌다. 이 기록은 현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은 자들에게 하는 경고다. 즉, 복음을 듣고서도 믿음으로 화합지 아니하면 광야에 엎드러진 모세 시대에 이스라엘 민족과 같은 결말을 맞게 된다. 이렇듯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인 복음이 그 사람에게 유익이 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믿음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믿음이 생기게 하는 것이 복음이다. 로마서 10장 17절,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는 말씀이 이를 한 마디로 설명한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복음이다. 복음은 사람의 믿음이 시작되게 하므로 믿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위한 능력이다. 그런데, 복음이 어떻게 믿음이 시작되게 하는 것일까?

 

내 아버지의 예 — 복음과 믿음의 시작

나의 아버지가 어떻게 믿기 시작하셨는지를 얘기하면서 생각해 보자. 큰 형이 목사인데 형을 해외로 파송한 교회가 부모님이 사시는 도시에 있었는데, ‘어떻게 애비가 되어서 모른체 할 수 있냐’면서 그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셨다. 아버지는 교회에 다니시면서도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른 후에 아버지가 팔순 기념으로 캘리포니아에 사는 큰 누나 집에 어머니와 함께 오셨다. 나는 그때 성경을 전공하기 시작한 지 4년 째였다.

누나 집에서 아버지를 만난 다음 날 새벽에 인기척에 잠이 깼다. 무슨 소리인가 하고 거실로 나갔는데, 이미 희뿌염하게 밝아진 거실 밖 패디오 의자에 아버지가 덩그마니 앉아 계셨다. 나는 테이블 맞은 편에 앉았다. 아버지는 “일어났냐?”고 하신 후 별 말씀이 없었다. 순간 4년 만에 다시 만난 아버지가 너무 애틋했다. 내 삶이 점점 더 세상적인 꿈과 멀어져 가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에, 이번에 한국으로 돌아가시면 언제 다시 아버지를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울컥했다. 건강하셨지만 연세는 이미 팔순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솔직한 심정을 말씀드렸다.

 

“아버지, 이번에 돌아가시면 언제 다시 뵐 수 있을 지 모르겠네요. 제 공부도 끝나려면 아직 멀었고 ….”

숨을 약간 몰아 쉬시며 아버지가 말했다. “그래. 다시 만날 수 있을 지도 모르겄다.”

그 말을 들으니, 가슴 한 켠이 아파왔다. 그 아픈 마음을 이기려는 듯이 나는 말했다. “아버지,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는 방법이 있어요.”

그 동안 한 곳만 멍하니 바라보며 무심히 말씀하시던 아버지가, 몸을 내쪽으로 돌리시며, 호기심에 가득한 얼굴로 물으셨다. “그래? 그게 뭔데?”

나는 확신있게 말씀 드렸다. “우리 모두 다 천국에 가는 거예요. 우리 모두 천국에 가면 다시 만날 수 있어요. 모두 다 다시 만날 수 있어요.”

아버지는 놀라서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목소리가 약간 흥분되어 있었다. “어떻게 해야 천국에 가냐?”

“지금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예수님을 잘 믿으시면 되요.” 내 대답을 기다렸다는 듯이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그래, 그럼 그래야지. 암만 그래야지. … 오늘부터 예수님 잘 믿고 살으마.”

 

그날 온 가족들이 모두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시고 한 시간 가량 떨어진 주립공원 해변으로 가서 내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세례를 베풀어 드렸다. 그 이틀 간의 짧은 만남이 아버지와의 마지막이었다. 한국으로 되돌아 가신 부모님은 열심히 교회에 나가셨단다. 교회까지는 차로 20분 정도 걸리는데, 차가 없는 부모님은 농업용 사륜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셨다. 어머니가 편하게 앉으실 수 있게 아버지가 손수 뒷자리에 의자를 달아서 두 분이 함께 타고 다니셨단다. 아버지는 한 번 한다고 하시면 끝까지 하시는 분이셨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예배를 거르시지 않으셨다. 비가 오는 날에는 두 분이서 우의를 입으시고 가셨다. 그러던 어느 날 사륜 오토바이가 빗길에 미끌어지는 사고가 나 어머니는 뇌경색을 앓게 되어 지금도 약을 드신다. 아버지는 다행히 아무 일도 없으셨지만, 안타깝게도, 2년 후에 경운기를 몰고 가시다가 트럭에 받혀 돌아가셨다. 어머니께서 나중에 말씀해 주셨는데, 아버지는 예수님을 받아들이신 후로 단 한 번도 기도를 빼먹지 않으셨단다. 돌아가시는 날 아침에도, “감사합니다” 하신 후 식사를 하시고 나가셨단다. 아버지는 예수님을 잘 믿으면 그토록 보고싶은 자식들과 손주들을 천국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복음을 듣고 믿음을 갖게 되셨다.

내 아버지의 예에서와 같이 복음은 마음을 열고 듣는 사람에게 믿음이 생기게 한다. “믿음에서 믿음으로” 중에 “믿음에서”가 이 믿음의 시작을 표현한다. 이 믿음이 생기는 것은 복음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의의 역사다. 하나님의 의가 마음을 열고 복음을 듣는 사람에게 믿음을 가지게 한다. 내 아버지의 예를 생각해 보면,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에 가서 자식들과 손주들을 다시 만날 수 있는데 예수님을 잘 믿으면 된다는 하나님의 의에 믿음으로 반응하신 것이다.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그 의를 받으시기 위해 그 전에 없던 믿음을 갖게 된 것이다. 이렇게 사람이 복음을 들었을 때 그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기 위해 믿음이 생기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이다. 달리 말하자면, 복음을 들었을 때 그 복음에 이끌리어 그것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 믿음으로 화합하게 하는 것이 복음이 가진 하나님의 능력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즉 복음으로 말미암는다는 말씀이 이를 표현한다. 

 

하나님의 의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하나님의 의가 무엇이길래 사람으로 하여금 믿음을 갖게 할까? 하나님의 의란,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누구나 없이 하나님께서 은혜로써 값없이 죄사함을 주신다는 것이다 (로마서 3:22-26).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기에, 오직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는가와 상관없이, 무엇인가를 해야할 필요도 없이, 죄사함 곧 구속의 은혜를 주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의다.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에는 두 개의 핵심이 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 독생자를 대속물로 내어 주셨다는 것이다. 둘째는,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누구나에게 구원을 주신다는 것이다. 로마서 3장 25절은 이 둘 다를 한 문장에 표현하고 있다. 첫번째는 “이 예수를 그의 피로 인하여 화목제물로 세우셨”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그 화목제물은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전에 지은 모든 죄를 용서받을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셨는데, 그 독생자 예수를 모든 죄인들의 죄값을 대신 치르는 화목제물로 내어 주신 것이다. 화목제물이란 죄인을 대신해서 죄값으로 치르는 돈이나 물건이다. 모세의 율법은 소나 양을 제사장을 통해서 화목제물로 바침으로써 하나님의 죄사함을 받게 했다. 그런데 때가 찼을 때, 하나님은 그 독생자 예수를 화목제물로 내어 주시고 이를 통해서만 이전에 지은 모든 죄의 죄값을 치를 수가 있게 하셨다. 세상의 모든 죄인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잠재우고 나아가 하나님과 화평케 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의 첫번째 포인트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도록 정하셨다. 무슨 말이냐면,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게 하셨다. 누구든지 차별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즉, 이전에 어떠한 삶을 살았든, 얼마나 큰 죄인이든,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아무것도 상관없이, 오직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는 모두 다 똑같이 구원을 얻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의 두번째 포인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죄인들을 내어 주신 것이 하나님의 의의 가장 중요한 내용이겠지만, 누구나 차별없이 믿기만 하면 구속의 은혜를 받을 수 있게 하신 것도 잊어서는 안 되는 하나님의 의의 내용이다.  

 

하나님의 의와 믿음의 시작

복음을 듣는다는 것은 이 어마어마한 하나님의 의를 듣는다는 것이니, 이 의를 듣는 순간 머리가 있고 마음이 열린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의를 받고 싶을 것이기에, 그런 사람들에게 믿음이 생긴다. 복음이 믿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인 이유는 바로 그 복음이 하나님의 의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거부할 수 없이 좋은 하나님의 의를 값없이, 오직 믿음만 가지면 받아들일 수 있게 하셨기 때문이다. 복음을 하나님의 의로 말미암아 그를 믿는 자들에게 구원의 능력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사람이 복음을 들었을 때 그 복음을 받아들이는 믿음을 하나님은 의로 여기신다. 달리 말하면,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의롭다 여기신다.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는 것이 죄사함이고 구속이다. 의롭다고 여긴다는 것은 죄가 없는 자로 대우한다는 말임이 원어나 영어(justification)에는 분명하다. 한글로 직역을 하자면 ‘정당화해 주다’리고 할 수도 있지만 한글번역에서 이미 잘 알려진 표현이 “의롭다 여기다”이다 (예, 로마서 3:24). 이 말의 의미는 죄가 없는 자로 여기는 것이니 이것이 곧 죄사함 즉 구속이고 좀 더 익숙한 말로 하자면 용서다. 로마서 3장 25절 후반절에 있는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신다”는 것이 이를 표현한다. 복음을 받아들일 때 처음 갖게 되는 첫 믿음이 바로 우리가 의롭다 여김을 받게 해주는 믿음이다. “믿음에서”의 믿음이 그 처음 시작된 믿음을 표현한 것이다.  

 

 

 

“믿음으로”

 

복음이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인 이유는 그 안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믿음을 갖게 하기 때문임을 보았다. 이 하나님의 의는 첫 믿음을 가지게 할 뿐 아니라 믿음으로 나아가게 한다. “믿음에서 믿음으로” 중 “믿음으로”가 말해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의 의가 어떻게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하는지 그리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볼 차례다. 

구원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믿음을 갖게 하는 것은 로마서 10장 17절이 있기도 하고 해서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반면, 처음 갖게 된 믿음이 계속되게 하고 성숙하게 하는 것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하박국 선지자의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다”는 말이 이를 설명해 준다. 이 말이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를 설명하고 있다는 것은 “하고 함과 같으니라”를 통해 알 수 있다. 따라서, 그 인용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면 “믿음에서 믿음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의 이해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를 좀 더 들여다 보면 재미있는 점이 있다. 먼저 주어인 의인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사람 즉, ‘믿음으로 의롭다고 여김을 받은 사람’이다. 이를 대입해서 그 문장을 다시 쓰면,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여, 의롭다 여김을 받은 사람은 믿음으로 살리라’가 된다. 여기에 믿음이 두 번 등장하는데, 처음 믿음이 “믿음에서 믿음으로” 중 “믿음에서”의 믿음임은 앞서 살펴 본 바와 같다. 처음 복음을 받아들이는 믿음으로 그 사람이 의롭다 여김을 받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말 속에 담긴 중요한 진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은 사람 즉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중요한 의미가 담겨져 있다. 하나는 믿음으로 의롭다고 여김을 받은 사람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 당연하다는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선언하시고 있다는 의미다. 

먼저,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은 사람은 당연히 믿음으로 산다. 거꾸로 말하면, 말로는 믿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였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믿음으로 살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이 아니다. 무슨 말이냐면,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의롭다고 여긴 사람은, 참된 믿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이고, 참된 믿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만이 하나님께서는 의롭다고 여기신다. 진정한 믿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을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기시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사람의 판단은 틀릴 수 있지만, 하나님의 판단은 결코 틀리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믿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였다고 말하면, 사람은 그것은 진정한 것으로 믿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사람은 사람의 속마음 나아가서 그 사람의 정신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진정한 믿음만 의로 여기신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속일 수 없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 6:7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신다”는 말이 이 뜻이다). 하나님은 그 사람의 믿음이 진짜인지 아니면 가짜인지 훤히 아신다는 말이다. 믿음의 진정성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가짜로 복음을 받아들이는 척하는 사람을 의롭다고 여기시는 실수를 하실 리가 없지 않은가. 이런 거짓된 믿음을 갖는 사람은, 따라서, 하나님께는 결코 의인이 아니다. 사람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은 그런 사람들조차도 믿는다고 하면 의인이라고 믿지만, 하나님은 결코 속지 않으신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인 하박국 선지자의 말,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적용되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은, 복음을 받아들였다고 하면서도 세상풍조와 세상적 욕망으로 산다. 그들의 삶이 그들의 믿음이 가짜 믿음임을 증거한다. 그들의 의인의 삶이 아니라 죄인의 삶이다. 따라서 사람의 판단은 중요치 않다. 오직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하신 사람만이 진정으로 의로운 사람이고, 그런 사람은 어떤 일이 있어도 믿음으로 살안 나간다. 

이를 통해 한가지 이해할 수 있는 것이 구원의 확신에 관한 논쟁이다. 구원의 확신만 있으면 구원받았다고 가르치는 교파도 있으니 중요한 주제다. 이를 주장하는 자들이 말하는 구원의 확신은 사람의 확신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그 사람의 구원에 대한 확신이 아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진정으로 의롭다 여기시는지 아닌지는 심판대 앞에 가기 전까지 알 수 없으니, 살아 있는 인간들로서는 결코 알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즉, 어느 누구든 성경에 기록된 경우를 제외하고, 사람의 구원에 대해 확신을 할 수 있는 경우는 없다. 그것은 인간의 판단 범위에 속한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받았다는 확신만 있으면 구원받은 것이라는 가르침은 비성경적인 인간의 바램에 불과하다. 다만, 구원의 확신을 갖고 싶다면,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행해야 할 것이다. 사도 바울도 자신의 구원에 대한 판단의 문제가 오직 주님에게 달려 있다고 했었는데 (고린도전서 4장 4절), 죽음이 목전에 다가왔을 때에는 자신이 싸워온 믿음의 싸움을 돌아보며 구원의 확신을 표현했다 (디모데후서 4장 7-8절). 구원의 확신을 갈구하는 사람들을 유혹하는 거짓에 현혹되지 않기를 바란다. 

하박국 인용문에 내포되어 있는 다른 하나의 의미는 하나님의 선포다. 다른 모든 하나님의 말씀과 같이 누구도 부정할 수 없고, 어떤 경우에도 틀리지 않는 진리임을 하나님께서 선포하는 강력한 의미가 담겨져 있다. 그 의미를 표현한 부분이 “살리라”이다. 이 부분을 영어로 “shall live”라고 한 번역도 있고 “will live”라고 한 번역도 있다. Shall이나 will은 둘 다 미래를 나타낼 수 있는 말이지만 그들의 뉘앙스는 전혀 다르다. Shall은 말하는 사람의 주어에 대한 명령을 나타낸다. 말하는 사람의 의지가 중요하고 주어는 그 의지에 따라서 해야 한다. 예를 들어 You shall go라고 말하면 “너는 가라”는 명령이다. 그것도 매우 강한 어조의 명령어다. 그래서 십계명과 같은 하나님의 계명 혹은 명령을 번역할 때 you shall …을 쓴다. “You shall not murder 살인하지 말지어다”가 그 예이다. 

반면에 you will live는 말하는 사람의 의지는 개입되지 않고 미래에 당연히 일어날 일에 대한 기술이다. 여기에는 오히려 주어의 강한 의지가 표현된다. 하박국 인용구에 대해 말하자면, 하나님의 의지가 아니라 주어인 의인의 의지가 표현되어 있다. 주어가 의지를 가지고 할 일을 말하는 선언적인 의미다. 즉 하나님은 주어인 의인이 반드시 그렇게 살 거라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사람의 관념으로 표현하자면, 장담이다. 

사람의 장담은 빈말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하나님의 장담이 빈말인 경우는 없다. 왜 그럴까? 하나님은 그 사람의 믿음이 참된 믿음인지 가짜 믿음인지를 훤히 아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은 그것을 그렇게 확실하게 아실 수 있을까? 하나님은 모든 것을 미리 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미리 아시는 능력은 인간의 머리로는 온전히 이해조차 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미리 아신다. 로마서 8장 29절이 하나님은 미리 아신다고 한다. 하나님이 전지하다고 할 때 그 모든 것 속에는 미래도 포함된다. 이를 하박국 인용문에 적용하면, 하나님은 어떤 사람이 믿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인 후에 계속 믿음으로 살 것인지 아닐지를 훤히 아신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그 사람의 인생을 끝까지 다 아시기에, 그 사람의 믿음이 진정한 믿음인지 아닌지를, 그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일 때 이미 아신다. 아니 그 사람이 태어나기 전부터 다 아신다. 미래에 그 사람이 믿음으로 사는 삶을 살 사람임을 아시는 하나님이 그 사람의 믿음을 의로 여겨 주신다. 하나님께는 실수가 없고, 하나님께서 의인이라고 여기신 사람은 반드시 의인이고, 의인은 당연히 변하지 않고 믿음으로 살게 되어 있다. 이와같이, “믿음으로 살리라 will live”는 하나님의 이 미리 아심에 바탕을 둔 하나님의 선언이다. 

 

하나님의 의와 믿음으로 사는 삶 (1)

하나님께서 선언하신 것과 같이, 참된 믿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여 의롭다 여김을 받은 사람은 반드시 믿음으로 산다. 이를 이해했으니, 이제는 하나님의 의가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자. 한마디로 말하면,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참된 믿음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그 어마어마하게 좋은 하나님의 의를 결코 잃지 않기 위해, 그 믿음을 버리지 않고 계속하여 믿음으로 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를 은혜로 얻기 위해서 진정으로 믿은 사람은 결코 그 구속의 은혜를 잃지 않기 위해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 다가오더라도 끝끝내 꿋꿋이 믿음으로 살아 나간다. 믿음을 잃고, 믿음으로 살기를 포기하면, 그곳이 의의 죽음이요 구속의 은혜는 물거품처럼 사라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여기서, 내 이야기를 예로 들어보겠다. 나는 하나님을 믿기 전에 많은 죄를 졌다. 사업을 시작하고 어떻게든 그 사업을 성공시키기 위해 고객들을 접대하면서 많은 부끄러운 짓들을 했다. 접대를 하면서 쌓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또 죄를 쌓았다. 사업이 어느 정도 안정 궤도에 들어서 이전에 꿈도 못꾸었던 돈을 만지게 되었을 때 급기야 영혼까지 병들기 시작했다. 오만과 교만 그리고 돈이 가진 힘에 의지하며 세상적인 욕망에 빠졌다. 그때에 저질렀던 죄들은 물론,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모르기에 육신의 정욕을 억제하지 못하고 저질렀던 수많은 부끄러운 죄들이 내 영혼을 칭칭 감고 있었다. 

방만한 생활과 심한 스트레스로 인하여 풍을 맞았고 그를 계기로 하나님을 믿기 시작했다. 성경을 공부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죄사함을 받을 수 있음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너무나 기쁘고 감사했다. 죄씻음을 받기 위해 세례를 받기 전날 거의 뜬 눈으로 세례를 기다렸다. 새벽까지 깨어 기도하면서 다시는 의도적으로 죄를 짓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날 이후로 내년 7월 26일이면 만 20년이 된다. 지금까지 죄없이 살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죄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늘 노력하며 살고 있다. 왜냐하면, 죄로 돌아가는 것은 은혜로 값없이 얻은 죄사함 곧 구속의 은혜를 잃어버리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처음 복음을 받아들일 때 가졌던 그 믿음이 이후에도 계속 살아 역사하여,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를 잃지 않도록 믿음으로 살게 해 주고 있다. 

 

하나님의 의와 믿음으로 사는 삶 (2)

이제 왜 하나님의 의가 그 믿음에 이르게 하는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이를 복음과 관련하여 좀 더 깊이 생각해 보자.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한마디로 죄와 죽기까지 싸우는 것이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모든 죄인들이 죄사함을 얻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내어 주셨고, 이를 믿는 자는 헬라인이든 유대인인든 누구든 죄사함 곧 구속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이 잘 살았든 잘못 살았든 상관없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구속을 받을 수 있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의다. 그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를 받기 위해 믿음이 시작되고 그 의를 잃지 않기 위해 계속 믿음으로 산다. 그런데, 그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의 핵심은 죄와의 싸움이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를 화목제물로 세우시기까지 하셔야만 했던 이유는 단 하나 죄를 없이 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요한일서 3:5). 죄를 없이하기 위해서 당신의 독생자를 내어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로, 그리고 기꺼이 그 화목제물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희생으로, 죄사함을 받았다고 믿는 사람이 어떻게 계속하여 죄 가운데 살 수 있을까? 로마서 6장 1-2절이 강력하게 부인하는 말이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해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이렇게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죄없이 사는 삶을 요구하는데, 이 죄와 싸우는 삶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삶으로만 가능하다. 성령으로 거듭난 후에도 죄성 가득한 육신을 입고 죄성이 지배하는 세상 속에서 사는 사람은 오직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를 바라” 볼 때 죄와의 싸움을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12:2). 자신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 위에서 피흘리시기까지 죄와 싸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 분의 정신을 본받아야만 죄를 이길 수 있다 (히브리서 12:4). 죄와의 싸움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하기에, 죄와의 싸움을 멈추지 않는 의인은 여전히 믿음으로 살 수밖에 없다.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처음 믿음을 가지게 할 뿐 아니라, 이와 같이 죄와 싸우는 삶을 살게 하는 믿음에 이르게 한다. 즉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사람으로 하여금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한다.

내 이야기가 이를 말해 준다. 하나님께서 독생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주신 이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그토록 처절하게 돌아가셔야만 하신 이유가 죄를 없기 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복음을 통해서 알았다. 그렇기에 믿음으로 죄사함 곧 구속을 받은 후에도 믿음을 버리지 않고 오히려 더 믿음에 강하여져서 죄와 싸우는 삶, 죄없이 살기 위한 삶을 살아 오고 있다.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나에게 처음 믿음을 가지게 했을 뿐아니라 이후에도 지금까지 믿음으로 살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믿음으로 사는 삶과 “믿음으로”

믿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이 계속해서 믿음으로 살 때, 이 믿음으로 사는 사람의 믿음을 표현한 말이 “믿음에서 믿음으로” 중 후자의 믿음이다.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먼저 사람으로 하여금 믿음으로 복음음을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믿음이 시작되게 하고, 나아가서 그 믿음이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하여 하나님의 의에 합당한 삶을 살게 한다. 이를 표현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한다”이다.  

따라서 로마서 서문인 1장 16절과 17절을 요약하면 이렇할 수 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인데 왜냐하면 그 복음에 있는 하나님의 의가 복음을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믿음을 가지게 하고, 나아가서 그 믿음에 멈추지 않고, 계혹하여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에 합당한 삶을 살게 하는 믿음으로 성숙되게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처음 믿음을 갖게 할 뿐만 아니라 계속하여 하나님의 의에 합당한 삶을 살게 하는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을 축약적으로 표현한 것이 “믿음에서 믿음으로”다. 따라서, 로마서의 서문이 믿음에 관하여 강조하는 것은, 복음을 받아들일 때의 믿음만으로는 결코 구원에 충분하지 않고, 반드시 살아가는 동안 죽기까지 역사해야 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로마서 서문을 통해 알 수 있는 로마서가 가르치는 믿음은 살아서 움직이는 믿음이다.

믿음에 관한 로마서 서문의 이 가르침은 로마서의 서론과 결론이 말하는 것과도 일치한다. 1장 5절과 16장 26절에 공통적으로 “순종하는 믿음”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이 바로 살아 움직이는 믿음을 표현한다. 먼저, 1장 5-6절은 바울의 사도로서의 직분은 순종하는 믿음을 갖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16장 26절은 복음을 나타내신 하나님의 목적이 모든 민족으로 순종하는 믿음에 이르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순종하는 믿음이란,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하는 믿음을 말하는데 앞서 하박국의 표현을 빌리자면, 믿음으로 살도록 인도와 힘을 주는 믿음이다.  

서문, 서론 및 결론을 볼 때, “믿음에서 믿음으로”에서 특히 “믿음으로”의 믿음이 로마서의 가르침의 핵심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믿음으로 사는 것”에 대한 가르침이 핵심임을 알 수 있다. 서문, 서론 및 결론이 강조하는 바가 그 책의 핵심적인 가르침임은 부인할 수 없다. 즉, 로마서의 가르침이 핵심은 믿음으로 사는 삶이다.

 

 

맺는 말

로마서의 서문이라고 하는 1장 16-17절을 이해하는 데 키의 역할을 하는 “믿음에서 믿음으로”를 얘기했다. 이제 로마서의 서문에 해당하는 1장 16-17절의 핵심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왜 복음이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인가’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능력은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게 하는 능력인데,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통해서다. 여기서, “믿음으로”에 해당하는 믿음에 이르는 것이 핵심인데, 이는 이 믿음은 그 사람을 믿음으로 살 수 있게 하는 믿음이다. 결국, 로마서는 믿음으로 사는 삶에 대해 가르치는 책임을 알게 되었다.

이 로마서의 핵심적인 가르침을 서문 속에서는 “믿음에서 믿음으로”라는 간단한 표현이 담고 있다. 이를 이해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마음을 열고 진리를 찾는, 참된 믿음으로 구속의 은혜를 받아,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시고, 성령께서 이해를 주신다. 마치 “있는 자는 더 받아 풍요하게 되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같다. 나의 이 글을 읽고 로마서 1장 16-17절을 온전히 이해하는 사람들은 감사하고 기뻐할 일이 아닐 수 없다. 모든 것을 미리 아시는 하나님께서, 이 글을 읽도록 미리 정하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